1980년 태생의 독일 철학자 마르쿠스 가브리엘은 『왜 세계는 존재하지 않는가』(2013년, 한국어번역본은 2017년)가 세계적인 베스트셀러가 되면서 일약 스타덤에 올랐다. 『신실존주의』(2018년)는 가브리엘이 ‘마음의 철학’에 대한 자신의 논의를 전개하고, 그에 대해 조슬랭 마크뤼르, 찰스 테일러(Charles Taylor 1931~, 영미 철학자), 조슬랭 브누아(Jocelyn Benoist 1968~, 프랑스 철학자), 안드레아 케른(Andrea Kern 1968~, 독일 철학자) 등 4인의 철학자가 각각의 입장에서 응답한 책이다(그들의 논의가 꼭 들어맞지는 않는 듯싶다─가브리엘의 두 편의 논문과 서두의 도입만으로도 충분할 것이다). 크게 두 가지를 집어보겠다.

 

1. 가브리엘은 원래 구성주의(constructivism)를 비판하는 입장에서 ‘신실재론’을 내세우면서 이름을 알렸다. 구성주의란 극히 단순화해서 말하면, 현실이라는 것은 존재하지 않고 다만 다양한 해석이나 표상이 현실을 이리저리 다루도록 하는 사회적 작용(앎, 미디어, 역사 등등)이 있을 뿐이라는 사고방식이며, 어찌어찌해서 반세기 가까이 큰 영향력을 행사해왔다. 예를 들어 개 짖는 소리라는 불변의 현실은 존재하지 않고, 사람들은 단지 “왈왈”이나 “멍멍”이라는 다양한 해석을 현실로 착각할 뿐이다─이 입장에 선 인문학 연구자들은 소위 ‘언어론적 전회’라는 이름으로 언어적으로 구축된 괄호 쳐진 ‘현실’에 대한 분석으로 나아갔다. 현실 자체는 실재하지 않고 다만 임의의 퍼스펙티브에서 이뤄지는 해석의 연쇄밖에 없으므로 현실처럼 행세하는 언어에 대해 사고하면 된다는 것이다.

 그러나 최근 가짜뉴스나 미디어 포퓰리즘 혹은 역사 수정주의가 판을 치는 것을 보더라도, 구성주의는 “목소리 가장 큰 놈이 그때마다 괄호 쳐진 ‘현실’을 구축해서 그것을 기정사실화하는” 상황을 추인하는 꼴이 아닐까? 애당초 언어 너머의 현실이란 정말로 ‘실재’하지 않는단 말인가? 구성주의에 반한다 해도 실재성에 접근하기 위한 철학을 다시 조직해야 하지 않을까? 이런 문제의식을 좇아 최근 십수 년간 실재론[신실재론]과 유물론[신유물론]이 급속히 각광 받기 시작했다(※). 가브리엘은 이 조류의 유력한 선두주자이며, 복수의 ‘의미의 장’의 객관적인 실재성을 강조한다.

 하지만 이야기는 여기서 끝나지 않는다. 왜냐하면 이 책 『신실존주의』에서는 구성주의와는 또 다른 비판 대상을 새롭게 조준하기 때문이다. 그것이 바로 자연주의다.

  가브리엘에 따르면, 자연주의란 마음을 물리적인 메커니즘으로 환원하려는 선택을 말한다. 즉 뇌과학이나 신경과학을 파고들면 결국 마음은 낱낱이 해명될 수 있다는 입장을 가리킨다. 그러나 그의 생각에는 이러한 ‘자연주의적 세계관’은 이미 막다른 골목에 와 있다. 가브리엘은 철학자 데이비드 차머스(David John Chalmers 1966~, 언어철학자)를 비판적으로 계승하면서 마음이든 의식이든 정신이라는 것은 뇌의 메커니즘으로 결코 환원할 수 없다고 본다. 물론 뇌에 기반하지 않고서도 마음이 어디선가 기적적으로 나타난다는 신비주의를 말하려는 것이 아니다. 요컨대 뇌가 없다면 마음도 생기지 않겠지만, 그렇다고 뇌의 반응을 완벽하게 기술한다고 해서 마음이 해명되는 것은 아니다. 왜냐하면 뇌로부터 마음에 도달하는 과정에서 질적인 도약이 일어나기 때문이다.

 이것은 부분의 총화는 반드시 전체와 같지 않다는 흔한 논법을 상기시킨다. (잘 알려진 것으로는 루소의 ‘일반 의지’가 있다─인민의 특수 의지를 모두 합친다 해도 일반 의지에 도달하지 않는다.) 가브리엘은 그것을 ‘자전거와 사이클링’ 간의 관계에 비유한다. 자전거=뇌는 사이클링=마음에 있어서 필요 불가결하지만, 자전거가 있다는 것만으로는 사이클링에 충분하지 않다. 자전거로부터 사이클링에 도달하려면 질적인 도약이 필요하다. 이 도약을 무시하고 자전거에 대해 아무리 해석한다 해도 사이클링을 알 수 없다…. 이와 같이 가브리엘은 마음을 뉴런(뇌)의 반응으로 환원하려는 자연주의를 인간 정신에 대한 몰이해의 발로로서 철저하게 비판하고자 한다.

 

2. 그 연장선상에서 가브리엘은 두 차원을 병치시킨다. 하나는 자연종이고, 다른 하나는 정신이다. 예를 들어 가브리엘이 생각하기에, 인간은 동물의 일종(자연종)이며 그만큼 동물과 마찬가지로 과학이나 의학의 대상일 수 있지만, 그 차원에만 환원되지 않는다. 왜냐하면, 인간에게는 또 다른 차원, 즉 “우리라는 신체가 모습을 보이는 차원, 인간이라는 ‘의미의 장’의 차원”과 이어지는 ‘정신’(Geist)이 있기 때문이다. 이 정신의 차원에서 인간은 인간 이외의 것과 구별된다. 다시 말해 인간은 자연종이면서도 그것과는 다른 차원으로 도약할 수 있다. 여기서도 또한 인간이기 위해서는 동물적 신체=자전거가 필요하지만, 그것만으로는 정신=사이클링에 이를 수 없다는 논법이 관통된다.

  나아가 가브리엘은 “심적인 것의 존재론”도 언급한다. 즉 작가의 정신이 만들어낸 가공의 등장인물(예를 들면 맥베스)에 대해서도 실재성이 있다고 보는 것이다. 혹은 마음속에 떠오른 허망도 설령 분명히 헛된 것이라 해도 그것이 현실을 바꿀 수 있음을 가브리엘은 강조한다. “보스 입자(boson)에 대한 나 자신의 이해가 틀렸다고 해서 그 입자가 바뀌는 것은 아니다. 그렇지만 허망은 자기 자신을 바꿔버린다. 게다가 완전히 다른 사람으로 바꿔 놓는 경우도 많다.” 자연종이 아닌 정신(허구/허망)이 현실을 바꾸는 사례는 주변에서 얼마든지 찾을 수 있다.

 예를 들어 지금 세상은 온통 코로나바이러스로 난리다. 윌리엄 버로스(William Burroughs 1914~1997, 미국 소설가. 자신의 마약중독 체험을 바탕으로 해서 마약 환자의 환각과 공포를 소설과 시로 다루었다.)의 “언어바이러스설”을 그대로 옮긴 것처럼 지금 세계는 코로나바이러스에 더해 마치 바이러스인 것처럼 숙주=미디어에 잠입해서 증식하는 바이러스 관련 유언비어에 시달리고 있다. 우리는 바이러스를 모방하듯이 바이러스에 대해 “열광적으로” 말하며, 그 이야기에 타자를 ‘감염’시키고 있다. 가브리엘의 용어로 말하면, 바이러스에는 자연종으로서의 바이러스와 정신(이 만들어낸 허구/허망)으로서의 바이러스가 있으며 이 모두가 사회에 영향을 끼칠 만큼 실재성을 갖추고 있다. (그렇다고 해도 바이러스가 퍼진 크루즈선의 내부사정에 대해 객관적인 보도도 하지 않고 해외전송의 정확한 정보 발신에도 기여하지 않은 채로 날로 증가하는 확진자 수를 선정적으로 보고하는 일본의 매스미디어는 확실히 나쁜 바이러스라고 말하지 않을 수 없다.─승객의 트위터를 인용할 뿐이라면 저널리즘은 필요치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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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자연주의를 비판하면서 정신의 고유성을 강조할 때, 신실존주의는 “신실재론”이라는 가브리엘의 간판이 과연 필요한 것일까? 가브리엘은 구성주의(=현실은 해석으로 환원될 수 있다)에 대해서는 실재론(=해석 너머에 ‘의미의 장’이 있다)를 내걸고, 자연주의(=마음은 뇌로 환원될 수 있다)에 대해서는 관념론(=뇌 너머에 마음이 있다)를 내거는 것처럼 보인다.─물론 이렇게 설명하는 데에는 약간의 왜곡이 있을 수 있지만, 그렇다고 이 설명이 아예 틀린 것은 아니다. (덧붙이면 가브리엘의 지적 출발점은 독일 관념론[특히 피히테의 관념론을 내재적으로 비판한 셸링 철학]에 있다.) 그렇다고 한다면, 그의 철학은 정체가 불분명하고 그다지 칭찬받을 만하지 않다.

 한 가지 말해둘 것은 자연주의에 대한 이 책의 비판 자체는 결코 이상한 논의가 아니다. 사실 마음이나 의식에 관한 모든 것을 과학적으로 다 기술할 수 없으며, 지금의 뉴런 중심주의는 사악한 이데올로기로 전화될 위험성 또한 있기 때문이다. 가브리엘 논문에는 다양한 논점이 잘 정리되어 있어서 한 번쯤은 읽어볼 만하다. 다만 철학에 대해서는 구경꾼의 입장인 나로서는 이 책의 논의가 (옳고 그름을 따지기 전에) 전체적으로 문제적이라고 생각한다. 그 이유를 세 가지로 간단히 적어둔다.

 

1. 팬데믹을 포함한 여러 문제에 간단하게 적용되는 이론은 이론으로서 별거 아닐 수 있다. 이 책을 포함해서 가브리엘의 저작은 사람을 깜짝 놀라게 하는 위험한 것이 아니라 비교적 온건하고 상식적이다(이 점은 약 10년 전에 한창 붐을 일으킨 마이클 샌델의 공동체주의와 비슷하다). 적어도 가브리엘은 과거 공저(『신화, 광기 그리고 웃음―독일 관념론의 주체성』, 2011년, 인간사랑)를 함께 낸 슬라보예 지젝과 같은 악마적 재주를 파는 타입은 아니다. 철학 스타가 출현하기를 고대하는 분위기 속에서 가브리엘의 사상이 과대평가된 면도 부정할 수 없다. 그야말로 일부 출판인과 언론인의 ‘마음’속에 가브리엘이라는 이름이 팽창하고 있을 뿐이 아닌가.

 

2. 자연주의가 인간을 뉴런(신경)으로 환원한다면, 신실존주의는 인간의 인간다운 이유를 푸쉬케(심적인 것)로 환원한다. 하지만 이 중요한 마음(정신)의 움직임에 대해서 가브리엘은 많은 말을 하지 않는다. 기껏해야 “허구의 이야기를 풀어내는 다양한 능력”을 꼽을 정도여서 분명하게 말하면 평범하기 그지없다. 자연주의를 비판하는 것은 좋지만 하찮은 인간주의로 돌아서는 것은 이론적으로는 후퇴일 수 있다. 게다가 ‘정신’의 유무를 통해 인간을 규정하는 방식에도 문제가 있다. 예를 들어 신체로 모습을 드러내지 않고 마음이 있는지 없는지도 모르는 태아는 어떻게 다룰 것인가? 태아는 인간이 아닌가? 혹은 반대로 동물에게는 마음은 없는가? 의문은 끝이 없다. 이 책은 부분부분 “인간 이외”라고 간주되는 것들을 부당하게 경시하는 것 같다.

 

3. 제2차 세계대전 후, 하이데거라는 거성을 만들어내면서도 나치즘에 이른 독일을 대신해서 프랑스가 오랫동안 철학의 거점이 되어 왔다. 전후 독일의 사상은 주로 프랑크푸르트학파의 학문을 잇는 사회학이나 정치사상에 의해 명성을 유지해왔다. 그 가운데 가브리엘은 독일에서 오랜만에 나온 철학의 신예임에 틀림없고, ‘신실존주의’라고 명명한 것에서도 그 야심이 느껴진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가브리엘은 신실존주의가 샤르트르의 실존주의와 무엇이 같고 무엇이 다른지에 대해 거의 다루지 않는다(서두에서 가브리엘이 약간 언급하는 정도). 생각해보면 ‘인간’을 다루는 방식에서 신실존주의가 실존주의보다 진전했다고 말하기 어렵다. 예를 들어 베르나르 앙리 레비의 대작 『사르트르의 세기』는 ‘실존주의는 휴머니즘이다’라고 말한 사르트르에게서 굳이 ‘실존주의는 반휴머니즘이다’라는 또 다른 급진적인 측면을 읽어내려 한다. 메를로-퐁티 또한 유아의 세계에 관한 뛰어난 통찰을 남겨주었다. 이런 깊이를 솔직히 인간주의에 바탕을 둔 신실존주의에서는 찾아볼 수 없다.

 여하간 최근의 유물론[신유물론]이나 실재론, 또는 인지과학이나 유전자공학은 철학에 큰 충격을 주고 있다. 그로 인해 유통기한이 끝날 뻔한 ‘인간’에 대해 가브리엘은 자연주의를 적으로 삼으면서 다시 한번 새로운 위치를 설정해주려고 한다. 이 신실존주의의 시도 자체는 흥미롭다. 하지만 그 싸우는 방식에 대해서는 납득하기 어렵다. 결국 지금은 과도기일 것이다.

 

 

(※) 이 점에 대해서는 『현대사상』 2018년 10월 임시증간호에 실린 마우리치오 페라리스(Maurizio Ferraris 1956~, 이탈리아 철학자)의 논고인 「새로운 실재론」에서 자세하게 언급된다. 덧붙여 이 호의 좌담회에서 미야자키 유스케(宮崎裕助)가 지적하듯이, 가브리엘이 포스트모던 사상을 ‘구성주의’의 이름으로 한데 묶는 것은 이상하다. 왜냐하면 프랑스의 포스트 구조주의자들은 오히려 그러한 현실의 구성작업이 모순을 내포하며, 이른바 내재적인 오류에 직면하는 데에서 유물론적인 계기를 발견했기 때문이다.

  이는 일본의 포스트모던 비평에도 해당한다. 하스미 시게히코(蓮實重彦), 가라타니 고진, 나카자와 신이치, 아사다 아키라(浅田彰), 아즈마 히로키 등은 각각 다루는 대상도 이론도 크게 다르지만, 대체로 유물론을 자신의 사상에 수용해 왔다. 예를 들어 아즈마 히로키의 『존재론적, 우편적』은 주체의 균열(=존재론적/지젝적/독일 관념론적)뿐만 아니라 커뮤니케이션의 실패(=우편적/데리다적/유물론적)로부터 ‘불가능한 것’을 사고한다는 아이디어를 제시한다.

 더구나 그들은 실재론(유물론)이 관념론보다 낫다고 하지도 않는다. 가라타니는 1984년 예리한 평론 「비평과 포스트모던」에서 알튀세르를 끌어와 “관념론이 혁명적인 ‘의미’를 갖는 시기와 장소가 있고, 유물론이 보수적인 ‘의미’를 갖는 시기와 장소가 있다”고 서술하고, 니체를 참조하면서 “주관에 물어야 하며 주관에 물어서는 안된다”는 패러독스를 이끌어낸다. 우리는 결국 이런 패러독스에서 벗어날 수 없다. 나아가 가라타니와 비슷한 이야기를 한 아도르노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비판적 사상의 목적은 과거 주관이 차지하고 있었지만 지금은 버려진 왕좌에 객관을 앉히려는 것이 아니고─왕좌에 모셔진 객관 또한 하나의 우상일 뿐이다─, 이러한 계층 질서를 폐기하려는 것이다”(『부정변증법』). 실재론이냐 관념론이냐, 객관이냐 주관이냐, 둘 중 하나를 ‘왕좌’에 앉히려는 것이 잘못이다.

 

 

출처: https://realsound.jp/book/2020/02/post-510064.html

 

 

Posted by Sarantoy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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