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로운 <현실>을 그리다:

‘조용한 혁명’ 이후 인류학과 과학ㆍ자연ㆍ인간

 

 

일본의 저명한 인류학자인 카스가 나오키(春日直樹)와 철학자이자 『식인의 형이상학』을 번역(공역)한 히가키 타츠야(檜垣立哉)의 대담을 간추려 요약 정리한다. 한국인류학의 수준은 일본인류학의 수준에 훨씬 못 미치지만, 80년대 이후의 한국인류학의 흐름을 이해하고 앞으로의 전망을 모색하는 데에 참조가 될 것으로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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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류학의 조용한 혁명

 

 

(히가키) 1980년대만 해도 일본에서 인류학은 철학이나 사상과 하나였다. 당시에는 사상연구자가 인류학문헌을 읽는다거나 반대로 인류학자가 철학문헌을 읽는 일이 일상사였다. 그런데 90년대 들어 인류학과 철학은 급속도로 단절된다. 브루노 라투르의 인류학이 부분적으로 들어왔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프랑스의 특수한 과학론의 맥락에서 이해되었다. 철학의 측면에서도, 이론으로서도 인류학은 종말을 고했다. 그런데 최근 인류학에 새로운 흐름이 다발적으로 생성되고 있다.

 

(카스가) 인류학은 80년대 후반 사상적으로는 표상주의[한국에서는 상징인류학이라는 타이틀로 유입되었다]와 포스트콜로니얼리즘의 영향을 강하게 받았다. 인류학자들은 조사대상이 되는 사람들과 동시대를 함께 살아간다는 의식을 강하게 표명함과 동시에, 기존의 민족지에 대해 강하게 반발했다. 그것이 어떤 단절을 낳았다. 그리고 그것은 제임스 클리포드의 『문화를 쓴다』로 대표되는 표상주의에 갇히고 만다. 인류학이 이전의 민족지적 전통에 과도하게 반응한 것은 표상이 대리/대변(representation)의 문제를 제기하기 때문이다. “From the Native’s Point of View”(현지인의 관점에서)는 지금까지도 인류학이라는 학문의 주요한 축을 이루고 있다. 그러나 그 한편으로 새로운 흐름이 80년대 후반에 생겨난다. 그 대표주자로 로이 와그너와 메를린 스트래슨을 들 수 있다. 이들은 대리/대변의 문제를 간단하게 해결한다. 한마디로 요약할 수는 없지만, 거칠게 말하면 그들의 작업은 기본적으로 일종의 가능세계를 표출시키는 것이다. 즉 문화의 ‘발명’ 혹은 ‘인공물’의 측면을 강조한다. 조사대상인 사람들 자신이 문화를 ‘인공물’로 ‘발명’하듯이, 인류학자 또한 그들의 문화를 ‘인공물’로 ‘발명’해나간다. 이를 통해 선주민의 사고는 우리의 사고의 잠재태가 되며, 양자는 서로에게 반향한다—수평적 반향(lateral reflection). 이 수평적 반향은 들뢰즈&가타리의 『천개의 고원』과 공명한다.

 

 

세 번의 전회

 

(히가키) 인류학에서는 지금까지 세 번의 전회가 있었다. 그 첫 번째 전회는 19세기 후반 인류학이 성립한 사실 그 자체를 가리킨다. ‘인류학자는 미지의 세계에 들어가 그 세계의 미세하고 희귀한 문물을 기술한다’는 상식적인 수준에서 인류학의 출현을 말한다. 두 번째 전회는 국민국가의 존재방식을 성찰하면서 그 비판을 행하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자기성찰의 인류학(Self-reflexive Anthropology)이다.

 

(카스가) 성찰인류학은 어떤 의미에서 포스트모던인류학이라고 말할 수 있다.

 

(히가키) 포스트콜로니얼의 담론은 자기성찰 속에 표상의 문제를 포괄한다[호미 바바의 『문화의 위치』가 딱 그렇다].

 

(카스가) ‘자기성찰’은 근대를 특징짓는 자기성찰성에 갇힌 사고라고 할 수 있다.

 

(히가키) 자기성찰은, 예를 들어 유럽이라는 주체가 타자를 볼 때 거울을 보듯이 자기 자신을 보는 것을 말한다. 즉 일종의 나르시시즘이다. 타자를 봄으로써 자신을 본다는 것, 타문화를 보면서 자문화를 본다는 것. 이것이 근대의 자기포박성이다.

 

(카스가) 여기서 관점이 어디에 있는지가 언제나 의문시된다. 이에 대해 비베이로스 데 카스트로는 관점[퍼스펙티브]이 사물 그 자체에 내재해있다고 논하면서 이 의문을 종결시킨다. 이것이 세 번째 전회이다. 이 세 번째 전회가 일어난 과정을 조금 더 자세히 살펴보자면, 레비-스트로스를 계승한 프랑스의 인류학자들을 함께 거론할 필요가 있다.

 

(히가키) 브루노 라투르는 프랑스인류학에서 그다지 중요한 위치를 점하지 않는다. 레비-스트로스의 영향을 강하게 받은 필리페 데스콜라와 프레드릭 켁이 이른바 프랑스인류학의 주류라 할 수 있다.

 

(카스가) 그러나 최근의 인류학 내의 존재론적 전회(Ontological Turn)를 이끄는 이들은 비서구의 인류학자들이다. 스트라샌 등과 같은 영국인은 존재론적 전회와 이론적으로 연결되지만, 그 자신은 존재론적 전회를 언급하지 않는다. 비베이로스 데 카스트로는 스트라샌의 기념강연에 초청되어 “Who is Afraid of the Ontological Turn?”이라는 제목으로 강연한 바 있는데, 이것은 존재론적 전회가 비서구의 인류학자들을 중심으로 ‘트릭스터’(trickster: 신화세계에서 선과 악, 창조와 파괴, 신과 자연의 세계를 넘나들며 장난치는 존재)처럼 급속하게 확산되고 있는 작금의 현상을 비유한 것이다. 이러한 상황에서 스트라샌 등의 영국인류학자들은 자신의 이론을 고착화하는 역할을 맡고 있다. 그것이 현재 영국의 인류학이다. 이렇듯 인류학의 상황은 확실히 변하고 있다.

 

(히가키) 지금까지의 인류학은 역시 문화에 특히 주목해왔다. 포스트콜로니얼리즘도 데리다적인 정의와 레비나스적인 윤리와 연결되어 그것을 확장하는 방향으로 흘러왔다. 에드워드 사이드와 스피박이 그 전형인데, 거기서는 휴머니즘/인간성이 중시된다. 그러나 그 한편으로 자연주의(naturalism)의 흐름도 존재해왔다. 라투르의 행위자-네트워크 이론(ANT)이나 스트라샌의 인공물에 대한 고찰이 그것인데, 사물 그 자체에 내재된 주체성을 찾아내어 그것으로부터 인간의 특권성—이것이 19세기적인 제국주의를 이끌어왔다—의 수정을 기도하는 것이다. 이 흐름은 정치적으로는 차별과 식민주의와 전쟁이 계속되는 속에서 중요한 의미를 가지며 인공지능이나 선진과학 등의 기술의 융성과도 관계한다. 이러한 자연주의가 20세기의 어느 시점에서 이론적으로 분출된 것이다.

 

(카스가) 맞다. 80년대 이후 선진국들에서 산업구조가 변화됨에 따라 산업 그 자체에 대한 재고찰이 행해졌고 그 다른 한편에서 소련이 해체되었다. 또 90년대부터 2000년대에 걸쳐 바이오와 정보산업이 활기를 띠어갔다. 인간과 비인간의 경계를 주목하게 된 배경에는 이러한 사회변화가 존재한다.

 

(히가키) 스트라샌과 와그너는 레비-스트로스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는가? 작금의 비베이로스 데 카스트로의 연구는 레비-스트로스를 『천개의 고원』으로 읽어내는 것이다.

 

(카스가) 와그너는 레비-스트로스의 구조주의를 당연히 의식하고 있었다. [영국의 대표적인 인류학자인] 에드먼드 리치는 구조주의적 도식을 만들었고(물론 간단한 도식이지만), 와그너는 구조주의적이며 3차원적으로 매우 복잡한 모델을 만들었다. 그는 뉴기니의 고산지대의 사회가 갖는 신화를 구조적으로 분석했다. 다만 레비-스트로스로부터 자극을 받긴 했지만, 레비-스트로스를 직접적으로 계승했다고 말할 수 없다.

 

(히가키) 데스콜라나 켁은 자신들이 본류라고 말한다(웃음).

 

(카스가) 프랑스에서는 어떤 학문을 하든지 간에 교육과정 속에 철학이 반드시 포함되어 있기 때문에 철학을 빼고서는 학문을 말할 수 없다.

 

(히가키) 그렇다. 프랑스 인류학에서는 모스, 바디유, 레비-스트로스라는 계보가 강조되고, 그 다른 한편으로 샤르트르와 메를로-퐁티가 공동관계 속에서 20세기 전반의 철학에서 중요한 역할을 맡았다. 그 의미에서 프랑스인류학은 사상이라고 말할 수 있다. 다만 프랑스인류학과 영국인류학의 병행관계에 대해 말하자면, 둘 다 식민정책에 기인한 제국주의시대의 잔존물이다.

 

(카스가) 물론 비베이로스 데 카스트로의 인류학 또한 영국이나 프랑스의 인류학이 없었다면 존재할 수 없었다. 그런데 비베이로스 데 카스트로의 민족지가 매우 흥미로운 것은 실제로 자신이 현지에 가서 식인에 관한 직접적인 데이터를 얻은 것이 아니라는 점이다. 그러면서 그는 과거의 사례를 스스로의 사고와 연결 지으면서 일종의 사고실험을 시도한다. 예를 들어 포로에게 성찬을 대접하고 누이의 남편으로 삼았다는 그의 기술은 그의 조사지의 과거기록에도 없으며 다만 페르난데스라는 사람의 이야기를 가져와 쓴 것에 불과하다. 그러므로 비베이로스 데 카스트로의 민족지적 분석은 구체적인 사실군이 아니라 이론화의 예시이다.

 

(히가키) 확실히 민족지학자라면 다양한 사례를 사용해서 도식적인 전망을 도출해내야 한다.

 

(카스가) 그렇다. 인류학에서 세부적인 사항들은 이론으로 만들어가는 데 저해가 되지만, 그 한편으로 텍스트의 외부성을 환기시키고 ‘뭔가 이상한데 재밌네’라고 할 만한 텍스트를 만들어내기도 한다. 그것이 인류학이라는 학문의 스타일이라고 생각한다. 그런데 이 재밌음이 비베이로스 데 카스트로에게는 없다. 그는 인류학을 잘해나가기 위해서 철학을 사용하는 것이 아니라, 철학적인 사고를 둘러싸고 인류학을 재구축하며 이를 통해 철학과 인류학의 두 영역을 연결한다.

 

 

인간세계를 넘어서

 

(히가키) 철학과 인류학의 관계에 대해서는 조금 있다 이야기하는 것으로 하고, 인류학의 세 번째 전회, 즉 현재의 인류학에 대해서 질문해보겠다. 인류학의 세계적인 흐름에 대해 잘 알지 못하지만, 일본에서도 작년 ‘인류학의 전회’라는 타이틀로 인류학의 최근 성과를 총서로 번역출간하고 있다. 인류학에 기대되는 역할은 지역연구와 국제공헌만이 아니다. 간단하게 말하면, 그간 인류학이 문화, 이민족, 혹은 다문화공생사회라는 테마에 함몰되어왔던 것이 아닌가? 물론 이러한 테마는 중시되어야 한다. 그러나 그것만으로는 프랑스의 국민전선과 미국의 트럼프로 대표되는 우익화 등의 다문화사회에서 일어나고 있는 현상을 제대로 설명해낼 수 없다. 세계 곳곳에서 진행되는 지구화와 이민사회에 대한 반동으로 이해될 수 있지만 그 속에서 단지 이론적으로 다문화공생을 제기하는 것은 너무나도 무기력하다. 이에, 신유물론이나 사변적실재론이라는 현대사상의 새로운 흐름과 관계하는 것이긴 한데, 인간 자신의 자연성을 고찰하면서 인간 그 자체에서 무언가를 도출하는 상황이 계속되고 있다. 인간세계에 머물지 않는 관점, 즉 자연이라는 개념이 변화하고 있다. 그리고 여기서 자연은 단순한 자연이 아니다. 비베이로스 데 카스트로가 다자연주의라고 말하는 그것으로서 이 자연은 그 자체로 매우 복잡하다.

 

(카스가) 인간세계를 넘어서는 차원에서, 그러나 초월적인 조감도가 아닌 방식으로 어떻게 현실을 새롭게 그려낼 것인가? 이 테마에는 스트라샌을 필두로 하는 현대 인류학자들의 고심의 존재론적 전회가 놓여있다. 예를 들어 조셉 존슨은 캐나다의 수렵민의 세계관은 물리학과 같은 자연의 진실을 그 자체로 다룬다는 주장을 자신의 체험을 토대로 전개하고 있다. 또 에두아르도 콘의 『숲은 어떻게 생각하는가』라는 저서도 있다. 콘은 비베이로스 데 카스트로의 영향을 받았고, 언어중심주의를 비판하고 숲의 환경 속에서 비인간을 포함하는 유기체들이 상징이 아닌 아이콘과 인덱스의 수준에서 어떻게 복합적인 의미의 네트워크를 형성하는가를 분석하고 있다. 이것은 매우 도전적인 저술인데, 이러한 ‘존재론적 전회’를 밀어붙이는 인류학자들이 곳곳에서 생겨나고 있다. 우리는 이러한 논의를 경의의 시선으로 바라보고 있다. 과학의 성과랄까 보편적인 진리가 축척되면서 불가사의한 현실을 허구에 남겨두는 것이 아니라 어떻게든 사유해야 할 필요성이 제기된다. 존재론적 전회의 흥망은 여기에 달려있다. 나아가 존재론적 전회는 서양의 인식론적 주체를 비판하는데, 존재론적 전회의 비판론자들은 존재론적 전회가 서양적인 보편주의를 재구축한다고 말한다. 앞으로 이를 어떻게 돌파해나가는가가 관건이다. 스트라샌의 영향을 받은 과학인류학자들을 보면, 기본적으로 과학을 기술의 관점에서 이해하고 있다. 기술을 빼고서는 과학을 이야기할 수 없으며 과학 특유의 사고법이 어떻게 형성되는지를 구체적으로 검토하고 있다.


(히가키) 인류학의 세 번째 전회의 특징은 로봇이나 유전자공학 등의 첨단과학을 그 연구대상으로 삼고 있다는 점이다. 자연주의는 그것을 배제하는 것이 아니라 바로 그러한 테크노그라시적인 사물을 별종의 자연으로 사고한다. 그러나 여기서 말하는 과학 혹은 자연은 어떤 과학이며 어떤 자연인가?

 

(카스가) 수학적 언어와 자연언어는 완전히 다르므로 아날로지만으로는 상호대화는 불가능하다. 그러므로 어떻게 관계지을 것인가가 문제이다.

 

(히가키) 과학의 언어라고 말한다면, 과학 자체도 언어인 것이다. 수식을 사용하는 것은 또 다른 언어를 사용하는 것이며 그것 또한 하나의 문화이다. 자연을 어떤 위상에서 다룰 것인가 혹은 자연적인 신체란 무엇인가? 즉 어떤 의미에서, 자연과학은 서양에서 발전한 일종의 신화라고 말하는 레비-스트로스의 『야생의 사고』로 되돌아가고 있다. 여하간 우리는 언어로 생각하기 때문에 자연을 문제시한다 해도 반드시 문화가 섞이기 마련이다. 그 속에서 자연과 다자연주의를 생각한다는 것이 매우 어렵게 느껴진다. 작금의 인류학에서 이러한 환경, 자연, 테크노그라시로 기우는 경향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는가?

 

(카스가) 간단치는 않다. 방법론이 어느 정도 잡히게 되면, ANT의 분석론과 같은 연구방법론으로 경도되고 만다. 문제는 어떤 접근법도 데카르트적인 심신이원론을 우선적으로 비판해야 한다는 것이다. 데카르트는 수학적 언어와 자연언어를 누구보다도 먼저 완전히 별개의 영역으로 만들어내었다. 현대의 우리는 뇌신경과학과 정보공학의 발전에 의해 바로 이 두 개의 영역을 가교시킬 수 있는 상황을 맞이했다. 이원론을 부정하는 것이 아니라 이원론의 내부로 들어가 본격적으로 그것을 다루는 과제를 부여받았다. 이 작업 자체가 새로운 문화의 창출이며 과학의 새로운 지침을 제기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히가키) 최근 일본인의 DNA 분석을 대규모로 진행한 바 있다. 이 기법은 과거에는 차별을 조장한다 하여 비판받았다. 일본열도의 인간들이 어디에서 왔으며 어느 정도의 차이가 있는지를 유전자를 통해서 밝혀내는 것이다. 즉 DNA를 철저하게 분석함으로써 일본인이라는 아이덴티티가 단일한 것이 아님을 자연과학적으로 밝혀내는 것이며, 이것은 유물론적인 정치로 나아가고 있다.

 

(카스가) DNA 결정주의로 비판받았던 것이 오늘날의 기법으로 사용되어, 문화를 붕괴시키고 있다. 인간인가 비인간인가는 잘 모르겠지만 여하간 자신을 다시 보는 것이다.

 

(히가키) 물론 이러한 DNA적인 기법 이전에 일본어 화자 공동체라는 하나의 틀이 있다. 이것의 습속, 역사, 문화적인 깊이를 무시할 수 없다. 그러나 그럼에도 그러한 문화적인 논의와는 별도의 출발점에서 생각해본다면 완전히 다른 세계가 펼쳐진다. 우리는 이것을 얼마만큼 철저하게 파헤쳐야 할까? 자연인류학과 문화인류학, 고고학과 철학과도 연결되는 이 테마를 과학적인 관점으로 접근함으로써, 포스트콜로니얼니즘을 한칼에 베어버리고 전복시키는 장치를 만들어낸다. 그것은 결코 반동이 아니며 사물과 자연의 일부로서 인간에 대한 논의를 열어가는 것이다.

 

(카스가) 좌파적인 관점에서도 자연주의는 진보적이다.

 

 

레비-스트로스의 오늘날의 가능성

 

(히가키) 퍼스펙티브주의란 무엇인가?

 

(카스가) 비베이로스 데 카스트로가 강조하듯이 그것은 ‘타자의 타자는 타자이다’라는 테마로 향하며 차이의 (내재적인) 제한 없는 생성을 이끌어내는 주장으로 이해될 수 있다. 그러나 스트라샌과 와그너를 읽어왔다면, 그들이 이미 아날로지의 연쇄라는 형태로 이 논의를 전개해왔고 다만 어떤 주의로 주장하지는 않았음을 알 수 있다.

 

(히가키) 『식인의 형이상학』의 원제가 『안티 나르시스』라는 것에서 알 수 있듯이, 『식인의 형이상학』은 『안티 오이디푸스』에 대한 저항이다. 결국 『안티 오이디푸스』도 나르시시즘이 아닌가 라는. 나르시시즘을 벗어나지 않고서는 타자를 말할 수 없다고.

 

(카스가) “From Native’s Point of View”가 인류학에서 ‘벗어날 수 없다’는 테제라는 것을 앞에서 이미 언급했다. 이 관점에서 반성은 확실히 나르시시즘적이다. 비베이로스 데 카스트로는 이것을 회피하는 것이 아니다. ‘타자의 타자는 타자이다’로 향하는 첫걸음으로서 그는 ‘타자’를 자기의 포식자와 같은 적(敵)의 이미지로 제기한다.

 

(히가키) ‘적’(敵)은 플라톤적인 우애와 같은 그리스 철학에 대한 어떤 안티테제이다. 들뢰즈&가타리가 『철학이란 무엇인가』에서 그리스적인 ‘친구’에 대해 말하고 있는데, 그것도 결국은 지중해문화와 예루살렘을 중심으로 하는 특정한 종교의 이야기에 불과하다, 라는 비판이다. 비베이로스 데 카스트로의 문화적 배경은 유럽적이라고 말할 수 있는데, 그럼에도 아마존이 큰 부분을 차지한다. 그 때문에 전세계를 지배하는 일신교적 체계와는 다른 문화기반을 가지는 아메리카대륙의 선주민 인디오들을 중심으로 새로운 인류학을 구축할 수 있었다.

 

(카스가) 서양화(西洋化)란 동시에 근대과학의 보급과 발전이기도 하다. 아무리 서양이 싫다 해도 서양에서 생겨난 과학적 사고방식은 제도적으로 세계각지로 확산되며 현실을 만들어내고 있다. 나의 입장은 이것을 더 넓은 사고방식의 관점에서 다시 다뤄보자는 것이다. 앞에서 조금 언급했다시피 스트라샌의 아날로지적인 연대가 매우 중요한데, 이 연대가 대칭적인 표현으로서 프랙탈적인 구조를 다룬다는 점에서 그러하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과학과 대비한다면 대칭적이라고 말할 수 없다. 아날로지적인 유대는 아리스토텔레스가 지적한 것처럼 비대칭적이며 그것은 결정적으로 과학적인 유대와 다르다. 여기서 조금 더 나아가면 레비-스트로스의 실타래가 나타난다. 『신화학』에서 전개된 신화 간의 유대는 원칙적으로는 대칭성의 파괴로서 제기되기 때문이다. 문화가 패턴의 실뭉치라고 한다면, 그가 통찰한 패턴에서 패턴으로의 변화는 과학을 포함해서 우리의 생활을 분석하기 위한 지침이 될 수 있다.

 

(히가키) 프랑스철학에서 푸코는 의학사를 발굴해내었지만 과학전체에 대해 주목하지는 않았다. 들뢰즈&가타리는 스트라샌과 같이 프랙탈과학에 관심을 가졌지만 과학 그 자체를 그 정도로 탐구한 것은 아니다. 데리다에 대해서는 좋든 싫든 ‘언어의 인간’이라고 말할 수 있다. 그렇게 생각한다면, 레비-스트로스의 이질성이 더욱 현저하게 드러난다. 그는 ‘야생의 사고’라는 테마로 서양적인 과학을 대칭화하고자 했다. 그러나 그 표적은 역시 ‘과학’이 아닌가?

 

(카스가) 레비-스트로스는 서양철학에 대해서는 대상화했지만 과학에 대해서는 그렇지 않았다.

 

(히가키) 그러므로 레비-스트로스를 어떻게 읽어야하는가는 큰 과제로 남아있다. 비베이로스 데 카스트로는 들뢰즈&가타리의 다양체와 잠재성의 논의를 연결짓는 수법으로 레비-스트로스를 다루고 있으며 이것은 매우 흥미롭고 독창적인 독해라고 생각한다. 또 레비-스트로스에게는 패턴의 문제가 있다. 그는 생물학적인 모델 패턴의 변형과 확장을 원용하면서 문화의 구조를 보고자 했다.

 

(카스가) 그의 표현대로, ‘구체적인 것의 과학’을 가지고 과학을 넘어서고자 한 것이 아닐까, 나는 그렇게 생각한다.

 

(히가키) 레비-스트로스의 사상은 철학자에게 가시와 같다. 데리다, 들뢰즈, 푸코의 사상은 다루기 쉽다. 그들은 철학의 사람들이기 때문에. 그러나 레비-스트로스의 작업에 대해서는 그의 시선이 너무나도 세부적이기 때문에 읽어나가기가 어렵다. 레비-스트로스가 60년대에 끼친 영향력은 어마어마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참으로 다루기 어려운 존재라는 이미지를 갖고 있다. 통합적으로 다루려고 하면 그것 자체가 반동적으로 흐르게 되고, 그 어렵다는 라캉적인 정신분석과 비교해서도 레비-스트로스의 작업은 지금까지도 명확하게 밝혀지지 않고 있다.

 

(카스가) 타자의 철학ㆍ사상과의 유대 하에서 그 자체의 실용성을 다루기 어렵기 때문이다(웃음). 고유명사가 많은 까닭에 읽기가 귀찮기도 하고.

 

(히가키) 그러나 비베이로스 데 카스트로든 데스콜라든 라투르든 들뢰즈&가타리든 어떤 의미에서는 레비-스트로스의 자식들이라고 말할 수 있다.

 

(카스가) 나 자신으로 말할 것 같으면, 레비-스트로스의 저작이 아니었다면 인류학을 하지 않았을 것이다. 우리 시대의 인류학은 영미계가 강했기 때문에 그의 작업에 대한 비판도 만만치 않았다. 나는 그의 업적을 어떻게 계승할 것인가라는 생각으로 지금까지 연구를 계속해오고 있다. 내가 삼은 그의 지침은 두 가지이다. 하나는 『야생의 사고』의 마지막 문장인 ‘인류학의 목적은 인간을 용해시키는 것이다’에 있다. 또 하나는 『신화학』을 지지하는 ‘감각적인 것은 이론적인 것이다’에 있다. 전자는 이미 현대인류학의 테마의 하나가 되었다. 내게 ‘용해’는 ‘구체적인 것의 과학’의 구축이 근대과학과 함께 전개해온 과정에서 성립된 것이다. 그리고 이 과정은 후자의 연구를 통해 열려진다. 근대과학은 ‘구체적인 것’의 과학과 마찬가지로 감각적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예를 들어 물리학자도 수학자도 좌변과 우변에 완전히 다른 것을 놓음으로써 방정식을 만들어낸다. 양변은 단지 약속에 따라 증명과 물리량의 측정에 따라 등치된다. 새로운 대칭성을 만들어내는 것이다. 레비-스트로스는 이것을 알고 있었다. 들뢰즈도 그러했다. 그렇기 때문에 가타리와의 마지막 공저인 『철학이란 무엇인가』에서 ‘도래할 수밖에 없는 민중’을 위한 과학을 예술ㆍ철학과 나란히 놓은 것이다.

 

(히가키) 들뢰즈도 『감각의 이론』이라는 책을 썼다. 프란시스 베이건의 그림을 사용하면서 감각적인 것과 이론적인 것을 접합시키고자 했던 것인데, 이것이 바로 감성의 논리이다.

 

(카스가) 레비-스트로스의 추상성은 매우 높다.

 

(히가키) 그렇다. 그 추상도는 들뢰즈와 또 다르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에게 레비-스트로스는 여전히 수수께끼로 남아있다.

 

(카스가) 영미계의 인류학에서도 『친족의 기본구조』는 비판해도 『신화학』에 대해서는 평가하지 못한다. 레비-스트로스에서 남은 것은 바로 이 작업이다.

 

 

인류학과 근대

 

(히가키) 인류학과 다른 학문과의 관계는 어떠한가? 철학이나 사회과학(사회학)과의 관계성은 예전부터 논해져온 바이고 최근에는 선사고고학이라는 분야에서 착종되는 것처럼 보인다. 그 외에도 예를 들면 앞서 잠깐 이야기했지만 과학인류학자로 소개된 브루노 라투르의 ANT도 그 교착에 대한 흥미를 이끌어낸다.

 

(카스가) 개인적인 의견을 솔직하게 말하자면, 사회과학에 거의 기대하는 바가 없다. 지금 나의 대학소속은 ‘사회과학연구과’인데, 예를 들어 ‘사회학이론’을 가르치는 사람이 없다. 지금의 사회과학은 새로운 토픽으로 옮겨갔는데, 현장은 그와 동떨어져있다는 인상을 받는다.

 

(히가키) 즉 문화적 표상을 좇을 뿐이다. 난민, SNS, 혹은 빈곤문제 등의 ‘유행’에 빠져있다.

 

(카스가) 일종의 사고의 태만이다. 철학과 인류학은 각각의 방법론에는 차이가 있지만 그러한 유행에 빠지지 않는 제약을 스스로에게 부과한다고 생각한다. 그 한편으로 개념에 의거해서 세계를 재구축하려는 강한 집념이 있으며, 또 다른 한편으로 구체의 세부에 대한 집착이라는 엄격함이 있다. 그러나 지금처럼 학자가 해설자가 되려는 학계의 풍토는 매우 심각한 문제라고 생각한다.

 

(카스가) 매우 소박한 의미에서 인간이 집단을 이루어 살아가는 것은 사실이며, 나아가 국가와 법을 가진 이상 동물 집단과는 분명한 차이가 있다. 이 사실을 인류학도 사회과학도 간과해서는 안된다고 생각한다.

 

(히가키) 인간과 비인간의 구분은 어떻게 넘어설까, 혹은 어떻게 그것이 연결되는가로 논의가 나아가야 한다고 생각한다.

 

 

과학ㆍ자연ㆍ인간

 

(히가키) 이제 우리의 대담도 끝을 향하고 있다. 다시 과학의 문제로 되돌아오면, 과학이 신체에 침투되는 가운데 인간이 점차 사이버화되는 것인가? 윤리의 문제는 여전히 존재하는데, 기술적으로는 이미 그것을 넘어서지 않았는가? 그렇다면 민주주의와 근대가 갖고 있는 이념을 어떻게 사고해야 할까? 나 자신은 이러한 이념이 이미 소멸되었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사물과 비인간과 인간 간의 관계는 아직도 해명되지 않고 있다. 혹은 말년의 데리다가 물은 것처럼, 동물과의 관계는 어떻게 해야 할까?

 

(카스가) 우리는 지금 전체적인 조망이 부재한 단계에 있는 것이 사실이다. 나 개인의 전망을 말하면, 50년 후에도 인류학이 존재할지 장담하기 어렵다. 단지 테크노그라시의 발전 때문만은 아니다. 예를 들어 양자생물학에서 비결정성을 생각할 때, 현 단계에서는 고전역학적인 이론과 양자역학의 논의는 완전히 정합성을 갖고 있지 않다. 양자의 수준에서 정합화될 수 없기 때문에 분자와 세포, 혹은 인간사회의 레벨에서 전체를 통일시킨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하다. 지금의 생물과학처럼 세부적으로 쪼개어 분석하는 것이 아니라 예를 들어 열역학과 진화론처럼 통합적으로 설명할 수 없다면 인류학 또한 자신의 전망을 갖기 어렵다.

 

(히가키) 20세기의 사회과학은—통계과학은 별도로 하고—일반적으로 그러한 물리현상과 사회현상의 접합을 회피해왔다. 그러나 19세기만 해도 그렇지 않았다. 2020년에는 어떤 기술이 등장할 것이며 어떤 사회적 문제가 나타날 것인지 확정할 수 없다. 그러나 우리가 분명히 감지하는 것은 사회라는 것의 이미지와 형태가 기술에 의해 완전히 변해가고 있는데 이 원리를 누구도 묻지 않는다는 것이다.

 

 

인류학과 일본

 

(카스가) 안타깝게도 지금의 일본에서 인류학과 민속학은 거리를 두고 있다. ‘일본적인 인류학’에 대해 말하면, 일본을 연구하는 인류학보다 일본의 인류학자에 의한 해외연구가 훨씬 더 ‘일본적’이며, 이른바 보편으로 통하는 고유성을 띠고 있다고 간주된다. 그러나 앞으로의 인류학은 민속학과 관계하지 않고서는 생각할 수 없다.

 

(히가키) 반대로 말하면, 앞으로 과제로 남겨진 것은 우리 자신에 대한 관심으로부터 일본연구에 민속학을 편재하는 것이다. 일본철학의 역사에서 민속학적 사고가 가진 임팩트는 결코 무시할만한 것이 아니다. 또 그러한 민속학적 사고의 흐름은 세계적인 다자연주의에 대해 또 다른 방향의 접근을 제공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카스가) 공감한다. 그러나 나 자신은 일본이라는 입장을 강하게 의식하는 것을 경계한다. 국제적으로 발언하는 경우에도 “From the Native’s Point of View”를 역이용할 생각이 없다. 자기 속에 타자를 끌어낸다는 것은 나르시시즘의 올가미일 뿐이다. 오히려 타자의 타자로서, 또 다른 타자가 되는 전망을 세워야 한다. 비베이로스 데 카스트로의 『식인의 형이상학』은 레비-스트로스의 자식으로서 그 작업을 보여준 것이다. 

 

 

 

春日直樹+檜垣立哉、「新な<現実>を描く」『現代思想』3月臨時増刊号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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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베이로스 데 카스트로의  『식인의 형이상학: 포스트구조주의적 인류학으로의 여정』(원제 Canibal Metaphysics: For a Post-structural Anthropology 2014년 12월 출간)의 일본어판(2015년 10월 출간) 해설을 번역해서 올려둔다.

비베이로스 데 카스트로는 한국에서 지식계는 물론 인류학계에도 전혀 알려져 있지 않지만, 세계적으로는 대단히 중요한 이론의 흐름을 이끌고 있는 인류학자이다. 다음의 글을 통해서는 당연히 비베이로스 데 카스트로의 학문을 전혀 알 수는 없고, 다만 그의 학문적 의의와 계보를 엿볼 수 있다.

레비-스트로스의 신화학과 들뢰즈-가타리의 안티오이디푸스를 먼저 공부해두어야, 비베이로스 데 카스트로의 학문의 진면목을 제대로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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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티오이디푸스』에서 『안티나르시스』로: 『식인의 형이상학』 해설

 

히가키 타츠야(檜垣立哉)

 

  1970년대까지 현대사상 속에서 인류학은 매우 철학에 가까운 학문이었다. 그 속에는 야마구치 마사오(山口昌男)나 레비-스트로스 같은 이들이 있다. 무엇보다도 기호론과 구조주의는 언어학과 인류학에서 발생한 유파이며, 그것은 항상 철학을 포함하는 인문학 전체를 아우를 만큼 대단한 영향력을 발휘했다.

  그런데 1990년대부터 지금까지 사반세기, 현대사상에서 인류학의 목소리는 점차 사그라지고 있다. 물론 정치적으로 포스트콜로니얼의 이론이 융성했고, 그 속에서 데리다와 스피박의 주장은 여러 방식으로 인류학과 관련된다. 일본 또한 민속학과 고유의 사상사의 발굴이 다방면에서 행해졌다. 그렇다고 해도 인류학의 ‘이론’은 두각을 나타내지 못하고 있다.

  거기에는 인류학 자신이 이미 탐구할 ‘미개’의 땅을 잃었다는 사정이 있을는지 모른다(브루노 라투르가 ‘과학’ 인류학이라는 장르로 활약하고 있고 최근 우주인류학까지 선언한 것은 그러한 사정을 현저하게 드러낸다).

  그렇다면 인류학은 진정 힘을 잃은 것일까? 특히 철학에 대해 혹은 철학이라는 유럽적인 지식세계의 내부에서 저항하는 강한 힘을 잃어버린 것일까? 실은 그렇지 않다. 에두아르도 비베이로스 데 카스트로라는 브라질 리오데자네이로 출신의 이 인류학자는 영어권에도 불어권에도 속하지 않는다. 인류학적 탐구의 상징인 브라질에서 출현한 이 인류학자의 존재는 다시금 인류학 이론의 가능성을 열어준다. 그리고 그는 레비-스트로스와 질 들뢰즈& 펠릭스 가타리를 연결함으로써 인류학과 철학의 이론적 교착을 이뤄내었다. 그러한 가능성을 드러낸 것은 매우 획기적인 성과라고 생각한다.

  이 상황은 현대철학에서 아감벤 사상의 유행과 유사한 점이 있다. 벤야민과 푸코와 들뢰즈를 연결하는 철학자로서 그는 매우 깊은 곳에서 로마적 종교성을 이끌어내었다. 이처럼 브라질의 인류학자인 비베이로스 데 카스트로는 영미계의 인류학자인 스트라샌과 와그너, 그리고 프랑스계의 데스콜라와 라투르, 중국사상학자인 프랑소와 줄리안, 들뢰즈&가타리를 너무나도 수월하게 연계하고 횡단한다. 그 속에서 그의 사상의 중핵은 물론 레비-스트로스이며, 나아가 말할 것도 없이 그 배경에는 아마존의 원주민들이 있다. 그에 입각한 전개는 대단히 견실하다.

  그렇다면 우리 일본은 인류학의 이 상황을 어떻게 받아들이고 있을까? 본래 일본은 영미권과 독일, 프랑스 사이를 자유롭게 오고가는 제3자로서 이탈리아나 브라질과 같은 입장에 있다. 그러나 지난 20년간 거의 누구도 그렇게 한 이는 없다(물론 발신하는 언어의 문제는 차치하고서라도). 게다가 그 이상의 문제로는 그동안 스트라샌이나 데스콜라의, 인류학의 고전이라고 불릴만한 저작마저 일본어로 번역되지 못했다는 것이 있다.

  일본의 인문학자는 대체 무엇을 하고 있는가라는 질문은 물론 나 자신에게도 해당되며 더 이상 따져들 수가 없다. 다만 브라질의 인류학자인 비베이로스 데 카스트로를 번역하는 것이 적어도 이러한 사정에 대해 조금이라도 상황을 개선시키는 데 공헌할 수 있기를 바라마지 않는다.

  이제 서설은 이 정도로 해두자. 그의 이 책은 모든 점에서 현대철학의 성과를 인류학으로 받아 안고 독자의 개념설정을 시도한다는 의미에서 극히 야심작이라고 말할 수 있다.

  물론 좁은 범위에서 이것은 레비-스트로스를 들뢰즈&가타리를 통해 재독하는 것이며 그와 동시에 들뢰즈&가타리가 이룬 철학지리학적인 탐구를 그 자신의 독자적인 방식으로 밀어붙이는 시도라고 말할 수 있다.

  그 자신이 5장 서두에서 언급한 것처럼 철학의 포스트모던의 흐름에서 들뢰즈&가타리의 이론이 사회과학의 분야에서 부당하게 경시되어왔다는 사정이 있다(이 점은 푸코와 데리다가 일찍부터 사회과학화했던 것과 큰 차이가 있다). 그러나 이 조류는 실제로는 들뢰즈&가타리와는 전혀 상관없이 전개되어 온, 애초부터 영국의 메를린 스트라샌(『증여의 젠더』)과 미국의 로이 와그너의 주장과 평행을 이루는 것이라고 비베이로스 데 카스트로는 지적한다. 나아가 프랑스 인류학과의 연관에도 그는 주시한다. 현재 프랑스 인류학은 브루노 라투르의 행위자-네트워크 이론 등과 이어지는 속에서 들뢰즈&가타리의 영향권 하에 놓여있다. 그런데 그가 칭찬하면서도 비판하는 필리페 데스콜라(『자연과 문화의 저편에』)의 주장과 그에 연결되는 인류학의 본류의 논의 속에서 들뢰즈&가타리는 본격적으로 논의되지는 않고 있다. 비베이로스 데 카스트로는 (세세하게 구분할 수 있지만 여기서는 크게) 레비-스트로스가 『신화이론』에 이르기까지의 ‘구조주의’의 입장을 취한 것에 대해, 그리고 레비-스트로스의 후계자인 데스콜라 또한 그러한 것에 대해—그는 데스콜라의 업적에 대해 아낌없이 상찬하면서 퍼스펙티브주의와 다자연주의 등의 이론도 데스콜라와 연관시킨다—, 후기의 레비-스트로스가 들뢰즈&가타리의 특히 『천개의 고원』의 생성과 리좀의 논의와 깊게 중첩된다는 것을 밝혀낸다. 토템적인 조합의 사고가 아닌 혼인=연계(alliance)라는 개념(그와 대립하는 것은 직선적인 계보(filiation)이다)을 강조하며, 생물학적(베르그송)ㆍ인류학적(『신화이론』의 레비-스트로스)인 생성적 리좀성을 끌어낸다. 그리고 그 자신이 이 후자의 논의를 확장시킨다.

  물론 비베이로스 데 카스트로도 들뢰즈&가타리의 인류학적 기술, 특히 『안티오이디푸스』를 인류학의 관점에서 많은 비판을 행하고 있음을 부정하지 않겠다. 그러나 더 중요한 점은 리좀과 생성이라는 관점이 실제로 들뢰즈&가타리와 관련하지 않는 영미의 인류학에서도, 레비-스트로스의 『신화이론』을 독해할 때에도, 미래 인류학의 논의를 추진해가기 위해서도 불가결하다는 것을 그가 명시한다는 데에 있다.

  그렇다면 이러한 비베이로스 데 카스트로의 시도의 중심축은 무엇일까? 그것은 그가 서두에 언급한 『안티나르시스』라는 말에 있다고 나는 생각한다. 그것은 본래 그가 쓰고자 했지만 쓰지 못한 책의 제목이며, 바로 이 책이 그 일부로 자리한다. 퍼스펙티브주의, 다자연주의, 신체와 식인이라는 테마도 이 개념으로 수렴된다(당연히 이것은 들뢰즈&가타리의 『안티오이디푸스』에 대한 저자의 독자적인 패러프레이즈이다).

  안티나르시스라는 개념은 극히 광대한 개념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그것은 그가 물론 포르투칼의 구식민지 출신이기 때문에 말할 수 있는 것으로서(그는 상층계급에서 성장했기 때문에 영어도 불어도 능숙하다), 비서양이라는 입장에서 인류학을 검토하기 위한 근본적인 원칙으로서 제시된다.

  서양인에게 인류학이란 언제나 ‘타자’의 탐구였다. 그러나 그것은 반드시 자기에 대한 타자로 설정되며 타자 속에서 다른 자기의 모습을 보는 것이기에 나르시스적일 수밖에 없다. 그 어떤 것이 탐구의 대상이든지, 서양적인 원리에서 인간으로서의 자기가 모든 관점의 중심이다. 인류학의 ‘성립’과 연관해서도 여지없이 그러한 나르시시즘이 중심에 있다.

  그런데 관찰대상이 되는 아마존의 인디오는 어떠한가? 당연하게도 그들에게 자신은 인간이자 문명인이고, 다른 문명권의 서양인이 비인간이다. 인디오는 당연히 서양인을 비인간으로서, 이물로서 관찰한다. 그들 자신의 고유의 기술이 있다. 여기서 인류학적 기술이란 과연 무엇인가? 그것은 유럽의 관점도 아마존의 관점도 포괄해야 하는 것이 아닐까? (퍼스펙티브주의의 원리가 바로 여기에서 도출된다)

  마찬가지로 아마존의 관점—그 자신이 다자연주의의 아이디어를 공급하는—에서 보면, 동물도 관점이 있고 사자(死者)도 관점이 있다. 그는 동물이 인간을 보는 순간에는 동물도 인간이라고 말한다. 안티나르시스는 인간과 자기의 측면을 고정하고 거기에서 타자의 세계를 다양하게 ‘해석’하는 시도를 거부한다. 그 대신 그는 그것과는 완전히 다른 것을 제시한다.

  이는 어떤 관점에서 보는 것이 올바른가 하는 문제가 아니다. 서양인에게는 서양인이 보는 관점이 있으며, 인디오에게는 인디오가 보는 관점이 있다. 그러나 그것은 ‘하나의 고정된 대상’이 실재하고 그게 대해 다양한 문화적 상대성이 있다는 것이 아니다. 동물이나 사자(死者)의 문화가 있으며 각각의 관점이 있다는 것도 아니다. 그렇게 되면 대상이 되는 자연은 일의적(一意的)인 것으로 규정되고 만다. 나아가 그러한 ‘객체적’인 대상X 등을 말하는 것도 아니다. 인간이 손님에게 대접하는 맥주는 어떤 동물들에게는 피일 수 있다. 그리고 거기에서 대상으로서 부여되는 것이 인간에게는 맥주이고 어떤 동물에게는 피인가 라고 묻는 것도 아무 의미가 없다. 거기에 있는 맥주/피로서의, 그 자신이 다양체인 자연만이 있을 뿐이다. 이러한 다양체로서의 자연, 그 속의 잠재성 그 자체를 다자연주의는 긍정한다.

  물론 다양한 해석의 문제가 완전히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다자연주의가 해석의 혹은 이문화적(동물의, 사자의) 관점의, 인간에 대한 해석의 가능성/불가능성 혹은 상대성을 묻는다면 이렇다할 의미가 없다는 것이다. 즉 동물에게는 동물이 인간이며, 사자에게는 사자가 인간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인류학자는 현지인에게 관찰의 대상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여기서 주장하는 다자연주의는 단순한 다문화주의의 자연화적 비전 그 이상으로 나아간다. 다자연주의는 확실의 번역의 문제와 관련된다. 그것은 다른 언어의 번역이기도 하다. 그러나 거기서 나타나는 것은 번역이 배반인 것처럼 어떤 이중의 뒤틀림을 예비하는 변용이라고 말할 수 있다. 이와 같이 번역이 본래 배반에 가까운 작용이듯이 생성으로서의 변용도 그렇게 찾아진다. 다자연주의에는 들뢰즈&가타리적인 잠재성의 다양체로서의 자연을 도입하는 자기 자신의 위치변용이 언제나 일어난다. 우리 자신이 인간/비인간의 이행 그 자체이다.

  신체의 중요성이 언급되는 것도 바로 이 때문이다. 관점이란 본래 신체적인 것이다. 다자연적인 것이란 그 자신이 신체이다. 그것은 라이프니츠, 들뢰즈&가타리에서 마이너철학의 계보를 연결지음과 동시에 아메리카인디오 독자의 세계관에서 명확하게 드러나는 문제이기도 하다. 인류학으로 말하면, 토테미즘적인 분류를 넘어 어떤 샤머니즘적인 의례를 거쳐 포식의 인류학(아마존의 식인이라는 존재방식, 즉 신체를 먹는 존재방식은 alliance의 수행에서 중요하다)까지 확장된다. 포식을 통해 우리는 신체를 자신 안으로 거둬들이고 산자와 죽은 자의 경계를 넘어 다양체로 변용하는, 아니 본래 그와 같은 것으로서 존재하는 그곳에 이른다.

  여기에 이르러 안티나르시스의 혹은 비베이로스 데 카스트로적인 다자연주의의 영역의 광대함이 밝혀진다. 그는 직접적으로는 후기 레비-스트로스와 들뢰즈&가타리의 『천개의 고원』을 중첩시킴으로써, 안티나르시스의 비전을 제시하고자 한다. 그러나 안티나르시스가 안티오이디푸스의 패러프레이즈라는 것에서 분명하게 알 수 있듯이, 오이디푸스라는 그리스=서양적인 문화의 근원에 대한 아메리카인디오적인 자연주의를 도입하고자 하는 의미도 상당히 강하다.

  최근 프랑스사상(아니, 마르크스와 벤야민, 혹은 비트겐슈타인과 크리프케(Saul Aaron Kripke)까지 고려하면 서양현대사상 그 자체)의 축은 그리스사상 대 유대사상이며, 이질적인 것으로서의 유대를 그리스에 대항하게 하는 것으로서 다루는 ‘타자’에 있다고 나는 생각한다. 그런데 비베이로스 데 카스트로가 브라질에서 발언하는 메시지는 오히려 아메리카인디오를 포함한 타자이다. 그리스와도 예루살렘과도 일절 관련하지 않는 ‘타자’. 프랑소와 줄리안이 중국을 다루면서 말하는 ‘밖’을 연상시키는 그것. 다자연주의가 다문화주의를 뒤집은 것이 아닌, 이러한 거대한 대칭축을 포함하면서 그려내는 것으로서. 그렇다면 일본은? 줄리안의 중국과도 다른 일본은? 그에 대한 답은 이제 그가 아닌 우리가 내려야 한다.

  이러한 광대한 인류학적 시도가 지금 이 시대에서, 진정 지구화라는 사태가 진행하는 시대에서 시작되었기에 가능하다는 것의 의미, 그리고 그것이 프랑스 인류학에 강렬한 충격을 안겨주었다는 것의 의미는 무시할 수 없다. 이 책을 구성하는 논문들은 제각각 포루투칼어와 영어로 쓰였음에도 불구하고, 최종적으로는 프랑스어로 출판되었다는 사정은 크다(이 책에서 필자 본인은 브라질 포루투칼어의 번역자의 이름을 들면서 불어판을 오리지날이라고 생각해도 좋다고 번역자들에게 말하고 있다). 네그리와 하트의 『〈제국〉』이 영어로 출판된 것과 같이, 글로벌세계에서 메이저언어로 마이너한 지역으로부터의 주장을 발신하는 전략은 앞으로 점차 커질 것이다.

  또 비베이로스 데 카스트로의 이 책은 들뢰즈&가타리를 읽어나가는 데에 길잡이가 되어줄 것이다. 좋든 싫든 들뢰즈&가타리의 사고가 단순한 유행이나 정치적인 캐치프레이즈 속에서 재생되고 있다는 사정을 생각하면, 인문과학에서 그 위치를 어떻게 보아야하는가는 중요한 과제이다. 리좀이든 다양체이든 그 자신으로서는 엄밀한 마이너과학의 개념으로서 읽힐 수밖에 없지만, 이 책은 들뢰즈&가타리의 사고를 레비-스트로스 후기와 접합시킴으로써 그 잠재적인 힘을 원리적인 측면에서 끌어내고 있다. 그리고 그것이 자연주의를 수렴하면서 그리스적인 것이 아닌 자연, 즉 아폴론적이지도 디오니소스적인 것도 아닌 자연, 경계의 자연에 그대로 관련하고 있다는 것, 이제까지 유럽사상 일변도였던 ‘철학’이라는 세계의 한계를 넘어선다는 의미를 보여줄 것이다(이 책 12장의 「철학이란 무엇인가」에서 ‘친구’라는 개념의 유럽성이 비판되며, 아메리카인디오의 ‘적’의 개념이 강하게 밀려나오는 등 이 책의 아이디어는 무궁무진하다). 그리고 반복해서 말하지만, 아메리카인디오와 그리스-유대의 자연이라는 광역의 논의를 영역으로 하는 이 책은 반드시 일본어의 비전을 밝혀줄 것이며, 그리하여 일본의 관점이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을 환기시켜줄 것이다. 

 

※ '존재론적 전회'를 주제로 한 비베이로스 데 카스트로의 강연영상

https://www.youtube.com/watch?v=cNTdIG-Z_ho

 

 

Posted by Sarantoy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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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편적 정신에서, 네트워크상(狀)의 프시케가 아닌 특이적 프시케로

: 사고의 탈식민화와 Endo-epistemology로의 전회를 위해

콘도 카즈노리(近藤和敬)

 

개요

본고는 사변적 전회 이후의 대륙철학의 동향, 철학과 함께 운동하는 인류학의 근년의 동향, 필자 자신의 과학적 인식론상의 입장의 급진화를 거친 견해로서, 특이적 프시케론(혹은 Endo-epistemology)을 전개한다. 먼저 1절에서는 비베이로스 데 카스트로의 『식인의 형이상학』의 사고의 ‘탈식민화’의 곤란함에 대해 논한다. 그 다음의 2절에서는 사고의 ‘탈식민화’의 문제를 서양근대철학사의 문제로서 파악한다. 3절에서는 이 ‘탈식민화’의 하나의 후보 사고양식인 포스트모던을 대표하는 네트워크상의 프시케론을 검토하고 그 문제점을 지적한다. 마지막으로 4절과 5절에서는 이 네트워크상의 프시케론과 구별되는 특이적 프시케론의 거점의 이론을 제시한다.

(※프시케는 그리스 신화에 등장하는 인간의 딸의 이름으로 이 말은 고대 그리스어로 마음, 혼을 의미한다.)

 

1. 인류학과 철학의 교차성: 《사고의》 탈식민화

비베이로스 데 카스트로는 근저 『식인의 형이상학』에서 다음과 같이 서술한다.

인류학과 철학을 교차시키는 독해방식은 한편으로 아마존의 사고에 의거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질 들뢰즈의 ‘이단’의 구조주의에 의거한다. 목적도 두 가지이다. [철학이] 사고의 영속적인 탈식민화의 운동으로서 인류학이라는 이념에 접근하는 것, 그리고 [인류학이] 철학과는 다른 방식의 개념창조의 방법을 제안하는 것이다.

여기서는 ‘사고의 영속적인 탈식민화’에 대해 논한다. ‘식민화’(콜로니얼리즘)란 우선은 대항해시대 이후 근대서양 제국의 산업자본주의체제의 자원수탈의 요청에 의해 서양국가와는 다른 토지에서 행해지는 토지, 신체, 권리, 생산수단에 관한 수탈전반으로서 이해할 수 있다. 이에 한해서 ‘탈식민화’는 통속적인 세계사의 서술을 빌면, 제2차 세계대전을 전후하여 아시아와 아프리카의 여러 나라의 민족자결과 독립운동의 융성에 의해 수행되는 정치적(그리고 경제적인) 독립으로서 근대국가로의 자립으로 이해된다.

그러나 탈식민화라는 것은 이중의 의미에서 단순하지 않다. 첫째로 현재의 탈식민화 상황이 실제로는 구종주국 혹은 경우에 따라서는 선진국과의 경제적 및 심리적 부채관계로 전개되며, 구종주국으로서는 구식민지국의 정치적 독립이 반드시 경제적 주종관계를 청산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둘째로 탈식민화를 촉진하는 하나의 동인으로 긍정되는 민족자결주의 이념이 항상 인종주의, 내셔널리즘, 다양한 래디컬리즘으로 타락하는 위험을 수반하기 때문이다. 식민지의 피착취민족의 당파성이 민족주의로 변모하는 것은 항상 그리고 현재 계속해서 일어나는 문제이다. 후술하겠지만, 이와 같은 민족주의와 내셔널리즘은 각각 동일성의 지배를 희구하는 것인 한에서 구조적으로 식민주의를 지지하는 사고와 별반 차이가 없으며, 이 점에서 《사고의》 탈식민화에서 극히 중대한 문제이다.

이렇게 말하면 근대서양이 지배자이고 그 이외는 피지배자라는 구도가 상기되는데, 이 상정은 역사적 및 정치경제적으로 타당하지 않다. 게다가 《사고의》 탈식민화에서 이 구도는 근본적으로 전혀 다르게 읽힌다. 근년의 ‘자발적 종속’ 논의와 푸코의 ‘주체화=예속화’ (subjectiviation) 논의를 상기한다면, 역사적으로 《사고의》 식민화는 식민지에서뿐만 아니라 근대서양의 내부에서도 동시에 수행되어왔다. 18세기에 생겨난 ‘국민국가’라는 제도로서의 장치 혹은 ‘인구’라 불리는 집괴(集塊)의 형성은 근본적으로 이와 같은 근대서양 자신의 《사고의》 식민화의 성과로 간주된다.

필자는 《사고의》 식민화/탈식민화에 대한 논의를 제외하고 식민화/탈식민화를 논하는 것은 근본적으로 무의미하며 오히려 위험하기조차 하다고 생각한다. 왜냐하면 《사고의》 식민화의 성립은 겉으로는 정치경제적 식민화의 제도를 없애는 탈식민화로 간주되지만(따라서 탈식민화 운동이 정체한다), 실질적으로는 이전과 동일한 시스템을 오히려 보다 효율적이고 생산적으로 유지하기 때문이며, 그렇게 해야만 현재 상황을 가능하게 하기 때문이다. 어째서일까? 그것은 《사고의》 식민화가 근본적으로는 산업ㆍ금융자본주의 체제에서 능동적인 아젠다로 기능할 뿐만 아니라 개체의 정신의 거세를 의미하기 때문이다. 즉 들뢰즈=가타리가 『안티 오이디푸스』에서 논한 것처럼, 그렇게 거세된 정신은 그들의 고유한 의미에서 ‘신경증’의 주체이며, 요컨대 다소간 《제대로 된》 근대적 시민이다. 식민화의 최종형태는 식민지의 인간들이 스스로를 근대적 시민으로 생산/재생산하며 미래의 빚진 돈을 현재에 투기하여 글로벌시장과 자본에 보다 큰 에너지를 비급하는 것이다.

그러나 여기에 문제가 있다면, 그 이외에 어떠한 미래가 있겠는가? 가난한 농촌에서 생활을 잘 해나가기 위해서는 자녀를 학교에 보내고 지식과 기술을 몸에 익히고 그 결과 그들 자신의 노동자로서 움직이고, 또 투자를 받아 기업을 일으키고 기업 활동을 통해 사회를 보다 좋게 만드는 것 이외에 어떤 선택지가 있겠는가? 물론 환경ㆍ자원ㆍ인구의 문제를 고려한다면, 이것이 근본적인 해결책이 아니라 해도 그 외의 방법이 없다. 그렇다고 여기서 멈춰 설 필요는 없다. 왜냐하면 이렇게 말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래, 그런데 말야, 그게 전부가 아냐, 라는 거거든.”

 

우리는 항상 근대인이다. 그렇지만 그것이 전부는 아니다.

Nous sommes toujours modernes, mais Ce n’est pas tout.

 

이 말은 라투르 저작의 불어제목인 Nous n’avons jamais été moderns(일본어 제목은 『허구의 ‘근대’』, 직역하면 ‘우리는 일찍이 한 번도 근대(인)인 적이 없다’)를 연상시킨다. 필자는 이 제목이 표상하는 라투르의 해결책에 강한 위화감을 느낀 기억이 있는데, 여기서 그 문제를 드디어 정식화할 수 있게 되었다. 순수한 서양근대인인 라투르가 ‘대칭성인류학’을 제기하면서 ‘우리는 일찍이 한 번도 근대(인)인 적이 없다’고 말하는 것에 대해, 그러한 라투르에 비하면 아직 ‘현지인’의 자격에 머물고 있는 필자가 철학의 이름으로 ‘우리는 항상 근대인이다. 그렇지만 그것이 전부는 아니다’라고 말하는 데에는 인류학적 관점에서 그 나름의 의미가 있다.

이때야말로 Pas-Tout, Not-Whole의 이론에 의거하지 않을 수 없다. 우리는 확실히 이 시스템 속에서 살아가기 때문에 근대적 시민으로서 행동하는 쪽이 좋다. 아니, 그쪽이 훨씬 유리하다. 이 사실은 바뀌지 않는다. 그러나 우리는 근대적 시민이라는 것만이 모든 것이 아니다. 근대적 시민으로 살아가지 않는 것이 근대적 시민이 아니라는 것을 반드시 함의하지 않는다. 근대적 시민인가 그렇지 않으면 죽음=혁명=절망=광기인가 라는 아이러니컬한 이항대립은 실로 신경증적인 시스템 측의 명법이 혁명자 측으로 이전된 것에 불과하다. 그러므로 진정한 혁명은 ‘우리는 근대적 시민이지만, 그것이 모든 것이 아니다’라는 명제가 아니고서는 생성되지 않는다.

따라서 ‘사고의 영속적인 탈식민화 운동’이라는 비베이로스 데 카스트로의 문구는 오히려 철학 쪽에서야말로 극히 중요하다. 상대에게 가해왔던 것이 단순한 제국주의가 아니라면, 정치경제적인 착취구조도 아니다. 오히려 그와 같은 것을 고발하는 주체로 간주되어 왔던 근대정신 그 자체이다. 바로 이 때문에 푸코와 들뢰즈가 의도적이라고 볼 수밖에 없을 정도로 프랑스의 알제리 문제를 언급하지 않았던 것이 아닐까? 그들이 문제로 삼은 것은 항상 서양의 전체주의이며 서양의 시스템이며 서양의 근대정신이다. 그들에게 이 모든 것은 같은 뜻을 갖지 않을까? 물론 그 동의성에 이의를 제기할 수 있다. 당연하게도 알제리 문제에는 고유의 문제군이 담겨 있고 그 속에서 파악되어야 한다. 그러나 철학이 해야 하는 것, 즉 ‘사고의 영속적인 탈식민화 운동’은 그것을 곁눈질하면서 그것과는 다른 방식으로 전개해야 한다는 것을 그들은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었다.

 

2. 보편적 정신의 형식적 정의

《사고의》 탈식민화는 보편적 정신에 의해 개시된다. 이를 논하기 위해서는 우선 ‘보편적 정신’을 규정할 필요가 있다. 나중에 살펴볼 특징에 의해 이 ‘보편적 정신’이 규정되는데, 일부러 이것을 미리 규정하려는 것은 앞서 다뤘던 모든 ‘근대정신’과의 차이가 의식되기 때문이다. 근대정신이 구체적인 역사와 제도적이고 텍스트적인 실질을 수반하는 구체물인 것에 반해, 여기서 ‘보편적 정신’은 그러한 구체적인 것을 그 (수학적인 의미에서의) ‘모델’로 포함하는 형식적인 (공리론적인) 구조물 혹은 ‘형식적 대상’이다. 따라서 그것은 의도된 ‘모델’로서 근대정신을 포함하면서도 그것과 같은 자격에서 인종주의와 내셔널리즘도 포함할 수 있다. 그와 마찬가지로, 보편적 정신은 특정한 철학자의 특정한 개념을 가리키지 않는 한편, 그 특징이 해당되는 임의의 철학자의 임의의 (경우에 따라서는 체계의 일부로서만 들어낼 수 있는) 개념에 대해 타당하다.

정의 1. 보편적 정신이란 그것을 공유하는 것이 인류만이 아니라는 조건에서 성립한다. 다만 여기에서 말하는 인류란 생물종명(혹은 생물분류명)으로서의 호모 사피엔스 사피엔스가 아니라 역사 속에서 항상 그 외연을 확장해온 역사적 개념으로서 ‘인류’이다. (북아메리카의 흑인노예해방을 상기해보라. 혹은 스페인의 중미인디언에 대한 의심도.) 다른 관점에서 말하면, 인류란 보편적 정신을 (공)유한다는 신앙과 그 신앙고백에 의해 지지되는 공동체이다.

정의 2. 보편적 정신이란 그것을 가진 자의 내면에 있지만, 그것을 가진 어떠한 자도 그 자체로서 가질 수 없는 자이며, 그 보편적 정신에 비해 그것을 가진 자는 항상 무엇인가를 결여한 자가 되고 마는, 이른바 이상(理想)적인 것이다. 프로이트의 정신분석학적으로 말하면, 이른바 초자아의 형성과 거의 같은 뜻이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내면화된 보편적 정신이란 ‘특정 타입의’ 초자아와 공유함으로써 생겨나며 권리상의 초자아 일반과는 다른 것으로 간주해야 한다. 그 의미에서 보편적 정신을 갖는다는 신앙에 의해 지지되는 공동체로서의 인류는 프로이트가 말한 것과 같이 (징벌하는 아버지를 인간 외부에 설정하는) 원시종교의 끊임없는 세속화 운동 그 자체에 의해 유지된다. 요컨대 보편적 정신이란 내면화된 초월신 종교로서의 도덕법칙이다.

정의2에 의해 보편적 정신은 각 개별적 정신에 대해 ‘모델/복사본 관계’(들뢰즈 2007:190)를 가질 수 있다. 즉 보편적 정신을 내면화하는 각 개별적 정신은 보편적 정신을 ‘모델’로 하는 ‘복사본’이다. ‘모델/복사본 관계’는 다음의 그림 1로 표현된다.

그림 1. ‘모델/복사본 관계’ 

 

그림 1에서 하나의 복사본에는 하나의 개별적 정신이 대입되지만, 그것과 ‘모델’을 매개하는 ‘유사성’의 관계로 연결되는 또 다른 복사본에는 동일한 개별적 정신의 다른 시간의 자(者)(과거의 나와 미래의 나) 외에 (정의 1에 의한) 동일한 인류로 간주되는 한에서의 타인이 대입된다. 이 그림을 사유하는 한, 타인의 얼굴에서 ‘너를 죽이지 아니하리라’가 보이는 것은 그 얼굴(보이는 것)에 도덕법칙의 보편적 정신(보이지 않는 것)을 볼 수 있기 때문이며, 그것은 또한 그것을 보는 자가 보편적 정신의 복사본이기 때문이다. 즉 너의 얼굴에서 자신의 얼굴을 봄으로써 보이지 않는 것(보편적 정신)을 본다는 것이다(인류에 대한 사랑과 신앙).

유사성의 정도를 확인해보면, 그림 1은 아우구스티누스가 이데아적인 도식에 기초하여 교사론(敎師論)에서 논한 것과 같이 (따라서 그것은 교회제도의 하나의 근거가 되기도 하는데), 그 유사성의 (혹은 분유의) 정도에 따라 쉽게 계급구조를 만들어낼 수 있다. 그것이 다음의 그림 2이다.

그림 2. --다(多)에 의한 복사본의 계층질서 

 

각 복사본은 이 계층질서에 따라 무수한 운동을 조직한다. 학교교육에서 개발도상국의 근대화, 그리고 이른바 ‘글로벌리제이션’에 이르기까지 모든 정방향적인 시간변화는 이 도식에 기초한다. 그 자들이 모두 향하는 것은 일자(一者)=선이며, 저항해야 하는 것은 유사성의 결여의 카오스=악이다. 그래서 이 계층질서가 작동하는 시스템에 항의하는 자와 이 시스템으로 전이(轉移)된 자는 이 질서의 흥과 망이라는 두 가지 선택지 밖에 가질 수 없으며, 그 결과로서 악=카오스를 구할 수밖에 없다. 그들에게 카오스야말로 바뀌어야 할 새로운 선이며 최후의 의거이다.

보편적 정신은 이상과 같이 ‘유사성’의 정도에 기초하여 《복수의》 ‘전체’를 구성한다. 근대정신은 이와 같은 ‘전체’ 가운데 《하나》이다. 그렇다면 탈식민화란 그 근대정신에서 벗어나는 것인가? 이미 서술했듯이 그렇지 않다. 왜냐하면 그것에 저항하는 방식으로 구성되는 것 또한 그것이 파시즘이든 인종주의이든 내셔널리즘이든 래디컬리즘이든 근대정신과 다른 또 《하나의》 ‘전체’를 형성하기 때문이다. 당연하게도 근대정신의 ‘전체’와 그것과는 또 다른 ‘전체’는 한편에서는 유사하기 때문에 어느 쪽이 진짜 ‘전체’인가를 둘러싸고 복권을 놓고 싸우게 된다. (그것이 아니라면 ‘전체’가 아니라 ‘부분’이다). 실로 이는 탈취해야 하는 ‘전체’라는 ‘모델’에 대한 ‘복사본’의 위치를 지정해준다. 그리고 그것들의 각 ‘전체’는 앞서 살펴본 것과 마찬가지로 동일한 계층질서를 형성하기에 이른다. 즉 그 방식으로는 근대정신에서 벗어날 수 있다 해도, 그것과 유사한 다른 모양의 무언가로 회귀하고 만다. 이 의미에서 보편적 정신에서 벗어날 수 없다. 즉 《사고의》 탈식민화란 이상과 같이 정의된 보편적 정신을 벗어나야 하는 것이다. 따라서 문제는 ‘탈보편적 정신’이다.

 

3. 탈보편적 정신의 하나의 길: 네트워크상의 프시케

그렇지만 탈보편적 정신은 지금까지 제기된 문제와는 전혀 다르다. 포스트모던의 본래 의미는 ‘거대서사의 종언’이다. ‘거대서사’가 앞서 살펴본 것과 같이 ‘유사성’에 기초한 계층질서에서의 상승운동에 불과한 이상, 포스트모던이라는 시대인식은 보편적 정신의 도식이 그 무엇도 잘해나갈 수 없음을 보여준다. 바로 ‘동일성’의 철학에서 ‘차이’의 철학으로, 독일관념론에서 프랑스 현대사상으로. 탈보편적 정신은 근대의 종언이라는 테마로 반세기 동안 다양하게 논해져왔다. 소위 ‘현대사상’(즉 그것 자체가 역사적인 산물로서의 ‘현대’ 사상)이란 이 탈보편적 정신의 하나의 시도로 이해할 수 있다.

포스트모던이라고 해도 그 자체가 다양하기 때문에 여기서는 그것을 의도적으로 모형화하고 통속화해서 논하고자 한다. 그래서 여기서 포스트모던은 보편적 정신과 마찬가지의 공리론적으로 특징지어진다.

정의 1. 포스트모던은 하나의 전체(‘거대서사’)가 아니라 다종다양한 모형(‘작은 서사’)을 구하는 미니멀리즘이다. 미세한 차이가 다종다양한 차이를. 거대 도식이 아니라 미묘한 차이를 낳는 디자인을. 거대 통일성이 아니라 다양한 개성을.

정의 2. 포스트모던은 국소주의이다. 큰 것을 조망하는지는 알 수 없지만, 특정의 작은 장소를 정밀하게 본다면 전체조차도 알 수 있다고 생각한다. 아니, 전체를 알 수 있는 것조차 요구하지 않는 경우도 있다. 요구하는 것은 특정하게 운위되는 것들이며, 그 속에서 세세하고 미세한 차이를 축적해간다.

정의 3. 포스트모던은 생명주의라는 의미에서 프시케를 용인한다. 혼(魂)은 세부에 머문다. 세부의 미세한 차이야말로 생성변화의 원인이며, 따라서 그러한 지각조차 되지 않는 미세한 차이야말로 프시케(움직임의 원인이라는 의미에서)의 실질(實質)이라고 생각한다.

이와 같이 포스트모던을 생각해보면, 그 특징을 다듬어낼 수 있고, 1970년대 이후의 문화론의 대부분은 이것으로 설명 가능하다. 정의 3에 느닷없이 프시케가 등장하는지에 대해 해설이 필요할지 모르겠다. 그러나 이것[프시케]은 ‘보편적 정신’이라는 전체론적 구조를 부정하는 이상 거의 불가피하다. ‘보편적 정신’을 인식하는 경우에 생명은 이 보편적 정신의 역동성으로 회수된다. 헤겔이 개념의 변증법적 운동이야말로 ‘생명’이라고 했듯이. 그러나 포스트모던에서는 이 ‘보편적 정신’이 효과를 갖지 않기 때문에 각각의 것이 향하는 방향이나 질서도 아직 존재하지 않는다. 그에 따라 인간과 동물과 물(物)과의 구별도 아직 상대적일 수밖에 없다. ‘자신을 스스로 움직일 수 있는 움직임’이라는 플라톤의 프시케의 가장 포괄적인 규정(『파이돈』245C-E)에서 프시케는 ‘생명’의 규정과 연결된다. 드디어 인간의 보편적 정신은 운동을 생성변화 혹은 생명의 범형으로 할 필요가 없고, 오로지 여러 다양한 생성변화야말로 생명 혹은 프시케의 장이 된다. 즉 생명은 미세한 것, 지각되지 않는 미분적인 것으로 해소된다. 요컨대 포스트모던이란 모나드로지가 승리한 시대이며, 라이프니치의 시대이다. 라투르가 네트워크의 왕자라면(Herman 2009), 라이프니치야말로 네트워크의 제왕이다.

모나드로지의 문제는 인간과 비인간을 대칭적으로 다룰 수 있다는 데에 있다. 연속성의 정도의 차는 있지만, 모든 것은 모나드이기 때문에 역설적으로 (모나드에는 창이 없기 때문에) 계층질서를 대신해서 단독의 정점을 가지지 않는 네트워크의 조직화를 촉발할 수 있다. 독립해서 상호 환원불가능한 모나드 동료들 간의 통일된 방향을 갖지 않는 모임이 그 모임의 신뢰도에 따라 허브를 형성해서 네트워크상의 집괴(集塊)를 자기조직화한다. 네트워크의 유니트(액터), 즉 모나드에 사람도 해당된다면 물(物)도 해당된다. 그래서 이와 같이 자기조직화하는 세계에서 리얼리티는 네크워크의 견고함에 의해 담보되며, 언제나 네트워크를 변신, 재조직화하는 것을 통해 재귀적인 리얼리티를 양성해갈 수 있다. 그 모습은 일정의 목적과 방향만으로 리얼리티를 감지하는 (어떤 의미에서 극히 남성적인) 보편적 정신에 의한 (기계론적인) 조직화와는 완전히 다른 것이다. 복잡계, 오토포이에이션, 창발주의. 그레이엄 하만(Graham Harman)의 대상지향형존재론도 매우 난폭하긴 하지만, 이러한 사고의 하나로 간주될 수 있다. 이때 여기서 논할 수 있는 것은 기껏해야 틀어박힌 대상 내적인 일차성질(모나드 내의 무제한의 벽 혹은 감각질) 정도일 것이다. 왜냐하면 그 내에서만 네트워크가 다른 방식으로 연결될 가능성, 즉 네트워크 자체가 생성변화할 가능성이 담보되기 때문이다. 마니그리어(Patrice Maniglier)가 지적한 것처럼 하만과 라투르를 동일시할 수는 없지만, 라투르가 수용되었다고 한다면 그 배경에는 조금이라도 위와 같은 사고가 있다고 생각한다.

그렇다면 포스트모던에서 네트워크상의 프시케는 정말로 ‘탈보편적 정신’으로 평가할 수 있을까? 아니, 그런 문제가 아니다. 문제는 모나드 혹은 부분 속에 은폐된 전체에 있다. 

네트워크에서 주체가 아닌 대상을 문제로 삼을 때, [주체에서 대상으로의] 전환은 보편적 정신의 구도에서 네트워크상의 프시케로의 전환이다. 보편적 정신의 구도에서 말하는 주체란 그 구도의 계층질서에서 운동하는 자이며, 어떤 종류의 부채=원죄(혹은 목적)에 따라 운동하는 자이다. 예를 들어, 여기서 자유의지란 칸트가 말한 것처럼 주어진 목적을 스스로의 의지로 따르는 것이다. 이에 반해 대상이 문제시될 때에는 이윽고 대상은 그러한 하나의 방향(목적, 부채, 원죄)으로 구성되는 ‘전체’를 전제로 하지 않고 (원죄=부채=목적으로부터) 《자유롭게》 (원죄로부터 자유롭기 때문에, 코제브는 그것을 ‘동물(과 다르지 않는)’이라고 말했다) 그 본성에 따라 운동하는 부분으로 사유된다. 부분의 자유로운 운동은 전체로서 하나의 거대 질서(네트워크)를 창발한다. 다만 그 질서는 부분에 대해 그것을 결여한 전체로서 부여되는 것이 아니라 부분의 자유로운 운동의 결과로 산출되며, 그 운동을 제어하는 것이라기보다 오히려 지지하는 것으로 간주된다. 예를 들어 페이스북이나 카카오상의 네트워크가 그러한데, 바로 부분(액터)의 자유로운 운동에서 네트워크라는 고차원의 질서가 자기조직화된다. 질서가 있고 운동이 생겨나는 것이 아니다.

부분(액터)은 결코 전체를 파악하지 않으며 전체를 정확하게 인식하는 것도 아니다. 또 전체를 이용하기는 하지만, 그렇다고 스스로 존재에 앞서는 전체를 논리적으로 전제하지 않는다. 그러나 부분을 초월한 것(‘모델/복사본 관계’의 의미에서 ‘모델’)으로서의 《하나의》 전체와는 다른 ‘전체’가 각 부분의 자유 및 주체적인 운동 속에 숨어 있다. 즉 그 부분을 부분이게 하면서 자족하게 하는 것인데, 그 《다수의》 부분의 ‘전체’가, 즉 그 부분의 본성을 규정할 수 있게 하는 무한개의 성질의 다발이라는 ‘전체’가 그 부분에 숨어있다. 이 성질은 다른 액터와의 이항 이상의 관계에 의해 현실화하는 관계적 성질(예: 어떤 물체는 가시광선을 쐬면 적색 이외의 파장을 흡수하는 성질을 갖는다. 즉 인간이 그것을 보면 붉게 보인다는 성질을 갖는다)과 그 자체만으로 현실화하는 고유성질 혹은 일차 성질(예: 만일 그러한 성질이 있다면, 예를 들어 어떤 것이 있을 때에 그 자체가 존재한다는 성질, 혹은 나만이 갖는 나의 아픔이라는 성질)을 사유할 수 있게 한다. 중요한 것은 이것들의 성질이 실제로 열거되는 것도, 현실화되는 것도, 인식되는 것도 아니고, 《다수의》 해당 부분에서 권리상으로 그것들이 《하나의》 다발을 이룬다는 것만을 전제로 한다는 점이다. 왜냐하면 만일 이것들이 다발을 이루지 않는다면 해당 부분은 실로 《자유》롭고 주체적으로 행동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렇지 않다면 그것은 다른 동일성 하에서 다발을 형성한다. (결국 그것들이 단지 《하나의》 다발을 형성하지 않는다는 것은 다발 자체가 항상 요청되는 이상, 《복수의》 다발의 형성가능성을 의미한다.) 그런데 그것은 다시금 예측불가능하며, 또 그 다발 속에서 모듈과 같은 것을 가질 수 없다. 즉 단순하게 말하면, 인격(단지 성격만이 아니라 신체적인 능력도 포함해서)이 복수화하고 그것들 사이의 상호교류는 (그것들이 공시성을 갖지 않기 때문에) 무언가의 미디어를 매개로 하지 않으면 불가능하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그러한 성질이 다발(즉 무언가의 통일성)을 성립한다는 전제 자체를 부정한다면 어떻게 될까? (실제로 이 부정이 다음 절에서 논의된다.) 그 경우, 그 부분이 갖는 제 성질은 모두 항상 그것과 접속하는 다른 부분과의 그때마다의 관계에 의해서《만》 현실화된다. 바꿔 말하면, 그 부분이 어떤 성질을 갖는가는 그 부분이 다른 부분과 실제로 관계를 갖기 전까지는 누구도(신조차도) 알 수 없다. 그 부분이 무엇이냐 하는 것은 그 부분이 어떤 다른 부분과 관계를 갖는가에 의해 결정된다. 따라서 무엇이 가짜인가 혹은 오히려 무엇이 실제인가는 다른 부분과의 관계를 갖기 전까지 본질적으로 규정되지 않는다. 따라서 그 부분은 스스로의 자유의지에 따라 주체적으로 행동할 수 없다. 자유의지에 따라 그 부분이 갖는 본성에서 주체적으로 행동할 수 있기 위해서는 그 행동이 《능력》으로서, 바꿔 말하면 ‘가능성’으로서 담보되어야 한다. 그렇기 때문에 그것은 ‘하는 것도 하지 않는 것도 할 수 있다’는 것이며, 그로부터 자유의지의 힘에 의해 ‘실제로 하거나 하지 않거나 한다’는 것이다. 자유의지는 가능성과 현실성의 균열에 거한다. 자신이 그러할 수 있다는 것도 모르는 것을, 그렇게 하고 싶거나 하고 싶지 않다는 것에 의하지 않고, 실제로 그러한 것이라면 그것을 자유의지에 따른 주체적인 행동이라고 부를 수 없다.

포스트모던에서 탈보편적 정신의 요청이란 실제로 금용자본제체의 세련된 (산업자본체제에서의 노동자적인 것이 아닌) 합리적 및 경제적인 주체적 액터의 형성의 이면에 다름 아니다. 요컨대 포스트모던에 의한 탈보편적 정신은 실제로도 그렇게 말해지듯이 주요한 노동형태의 변화, 2차산업에서 3차산업로의 (산업자본체제에서 금융자본체제로의) 이행에 대응하는 노동형태의 변화에 호응하는 것이다. 스스로를 대상으로 보는 것은 주체를 보편적 정신의 목적성이라는 멍에로부터 해방시키는 것이다. 특정한 초월적 목적 없이 게임으로서, 유희로서, 흥미로서 능력의 자유로운 발휘를 향유한다. 나도, 유전자도, 동물도, 소립자도, 각각이 각각의 성질의 다발 하에서 특정한 목적 없이 그 보유능력을 발휘하거나 발휘하지 않거나 한다. 당연한 귀결로서 능력의 발로의 옳고 그름 사이의 거리가 벌어짐에 따라서 자유의지가 개재하는 정도도 커진다. 무기적인 물체에서 그것은 최소화되고, 유기적인 생명, 특히 고등한 정신조직을 가진 생물일수록 그 차이도 커진다. 그리고 세계는 그러한 액터들이 구성하는 게임적인 현실성을 직조한다.

보편적 정신이 전체와 부분과의 환원불가능한 거리에 의해 정의된다고 한다면, 네트워크상의 프시케는 하나가 되는 전체를 억압함으로써 각 부분의 내부에, 그 부분 고유의 미니 전체(라투르의 표현대로라면 ‘미니초월’)로서 그것을 회귀시키는 것으로 정의된다. 즉 부분과 전체의 거리가 제로가 됨으로써, 각 부분 간의 미세한 차이가 결코 없어지지 않음으로써 정의될 수 있다.

 

4. 탈보편적 정신의 또 하나의 길: 특이적 프시케

비베이로스 데 카스트로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서양인은 선주민이 신체를 갖는다(동물도 신체를 갖는다)는 것을 결코 의심하지 않았다. 한편, 선주민은 서양인이 마음을 갖는다(동물과 죽은 자의 영도 마음을 갖는다)는 것을 결코 의심하지 않았다. 서양인의 자민족중심주의는 타자의 신체가 마음을 포함하며 그것이 형식상, 그들 자신의 신체에 머무는 마음과 유사하는 것을 의심한다. 반대로 아메리카선주민의 자민족중심주의에서는 타자의 혼과 정신이 선주민의 신체와 유사한 물질적인 신체를 갖는다는 것을 의심한다(2015:35).

‘만약 모든 것이 혼을 갖는다면’(같은 책: 69)에서 이 ‘만약’을 비베이로스 데 카스트로는 자신의 저서에서 진지하게 다루는데, 이것이 앞 절에서 살펴본 의미와는 다른 의미인가 라는 것이 여기서의 본질적 문제이다. 카스트로에 대한 비판의 상당부분은 그의 설정이 앞 절에서 본 것과 같은 포스트모던적인 것에 불과하다는 심증에서 비롯된다. 이 ‘만약’은 예를 들어, 플라톤 연구자인 후지사와(藤沢)에 의해 다음과 같이 언급된다. “과학이 우주의 물리적인 위상에 대해 새롭게 파헤친 지각은 『우주의 프시케』의 사상과 상호보완적이기는 커녕 동일한 사태의 다른 말—‘물’ 언어와 비‘물’ 언어—에 의한 기술일 가능성이 크다”(2014:13).

형이상학에서 ‘존재’로서의 ‘존재’를 묻는 것만이 문제는 아니라고 해도(Maniglier 2014), 혹은 정통한 ‘형이상학’이 결국은 그러한 것일뿐이라고 해도(安藤 1965), 그 이외의 철학이 있어야 한다면, 거기서 문제가 되는 것은 철학사적인 경위를 보면 (플라톤으로 거슬러 가면) 프시케라는 것이 분명하다. 그러나 반복해서 말하면, 그것이 앞 절에서 살펴본 것처럼 라이프니츠풍의 것인지, 아니면 그것이 아닌지(후에 보는 것처럼 스피노자풍의 것인지)라는 것은 반드시 물어야 할 문제이다.

문제는 역시 Pas-Tout를 어떻게 볼 것인가이다. 얼핏 보면 스피노자야말로 전체주의의 철학자처럼 비춰지지만(바디우 1988:129-136), 실은 그 반대로 스피노자야말로 들뢰즈가 말한 것처럼(들뢰즈가 그것을 어디까지 철저하게 파헤쳤는가는 별도로 하고), Pas-Tout의 철학, Endo의 철학의 첨단까지 밀어붙인 모험자이다. 스피노자는 오히려 전체라는 것을 만남의 불가능성의 관점에서 철저하게 내버림으로써 부분만의 사고를 가능하게 했다고 말할 정도이다. 이에 대해 조금 더 살펴보자.

스피노자는 『에티카』「제1부 신에 대해」에서 ‘영속ㆍ무한의 실유(實有)’인 신=자연의 개념의 정의를 도출한다. 『에티카』전체의 구성을 염두에 두지 않고 이 부분만을 읽으면 얼핏 모형적인 신 개념을 자의적으로 구성한 것처럼 보인다. 즉 ‘존재의 모든 것은 신 안에 있다’라는 명제에 등장하는 ‘모든 것’에 관해, 스피노자는 ‘전체’=‘신’으로 인식한다고 읽히는데, 이것은 잘못이다. 왜냐하면 그것이 2부 이후 정의된 우리 인간의 정신에서는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우리는 1부에서 정의된 유한양태인 이상, 연장 속성에서도 사유 속성에서도 어느 쪽이든 그 변상(變狀)의 원인을 결여한다. 즉 어떤 의미에서도 ‘전체’를 인식할 수도 지각할 수도 없다. 그렇기 때문에 ‘존재하는 모든 것은 신 안에 있다’라는 명제를 우리 인간 정신만이 가능한 인식으로 읽는다면 그것은 오독이다. 그것은 검증한다거나 경험한다거나 하는 것이 가능한 명제가 아니라 순수하게 어떤 개념적 설정(공리적인 정의)에서 필연적으로 인도되는 특정의 개념적 설정이다. 이 자체는 그 이상의 방식에서 타당성을 인정할 수 없으며 또 그렇게 되지도 않는다. 검증 가능한 것은 이 개념적 설정에서 2부 이후로 이끌리는 인간에 대한 제 정리뿐이기 때문에 그것을 이끌기 위한 개념적 설정 그 자체의 진위를 검증할 수 없다. 다만 오로지 그 설정에 의해 검증 가능한 사태에 관한 타당한 추론을 검증하는 것, 그 이상의 정당성은 갖지 않으며 가질 수도 없다. 이 의미에서 『에티카』1부는 순수한 형이상학이라고 말할 수 있다(1부는 공통개념에 의한 2종인식이다). 그리고 1부에서 관심은 ‘전체’인데, 이 ‘전체’의 후보자는 그 자신이 가진다고 상상된 ‘전체성’이 부정되어 가고, 하나인 전체만이 ‘무한(정)’으로 간주된다.

무엇보다 전체의 후보는 ‘본질’인데, 이것을 표현하는 속성은 그 자체가 직접적으로도 간접적으로도 무한의 양태를 포함함에도 불구하고 그것과는 다른 속성이 무수히 있다고 말할 수 있다. 그리고 우리들은 단 둘의 속성(사유와 연장)밖에 모름에도 불구하고, 그 무수한 속성을 무한하게 포함할 수 있는 것이 유일한 실체로서 신이라고 말할 수 있다. ‘모든 것’은 누군가에게서 실체로서의 신에 포함되는데, 바꿔 말하면 진정한 의미에서 ‘모든 것’은 가령 그것이 인식된다 해도 신=자연으로 인식될 수밖에 없다, 라는 것이기도 하다. 정말로 이 의미에서 자기원인으로서의 ‘자유’는 이 ‘신=자연’만으로 인식되어 그 이외의 모든 것으로부터의 ‘자유’ 즉 모나드로 인식되는 ‘자유’가 박탈된다. 무한하게 넓어지는 광대한 우주 전체조차 간접무한양태에 불과하다. 가령 속성 그 자체에까지 거슬러 간다 해도, 그 속성이 모든 것은 아니다. 끝까지 말한다 해도 ‘그것이 모든 것은 아니다’라고 덧붙일 수 있는 개념적 설정이야말로 ‘영속ㆍ무한의 실유’인 ‘신=자연’의 정의인 것이다. 목적도 이와 마찬가지이다. 이 사유에 목적을 떨구어 놓으면 목적 그 자체는 불가능한 것(기껏해야 우리의 불가피한 오진 혹은 상상물)이 된다. ‘일반적인 것’의 규정도 이와 마찬가지이다.

스피노자가 ‘신=자연’이라는 전체를 적극적으로 구성하는 것 같지만, 실제로는 그 개념설정에 의해 정말로 철저한 방식으로 (부정신학과 같이 중도포기하지 않고) ‘전체’를 불가능한 것으로 파기한다. 우리 양태는 이 개념설정을 취하는 이상, 절대적으로 어떠한 ‘전체’와도 만날 수 없으며 인식할 수도 없다. 따라서 모든 전체와의 만남, 혹은 인식은 원인의 결여에 대한 인식을 결여하는 오진이며 우리의 상상의 산물에 불과하다.

그런데 모든 ‘개체’는 물체라는 양태의 ‘합일’에 의해 구성되고, ‘개체는 정도의 차가 있지만 혼(animata)를 가진다’. “왜냐하면 모든 물에 관해서, 필연적으로 신 안에 관념이 있고, 그 관념은 인간신체의 관념과 동일한 신을 원인으로 하며, 따라서 우리가 인간신체의 관념에 대해 논한다는 것은 모든 물(物)의 관념에 대해서도 필연적으로 말할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같은 책). 그리고 그 개체의 혼=프시케는 인간정신이 인간신체를 대상으로 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그 개체를 대상으로 한다. 즉 “모든 동물과 그 외의 우주의 구성요소는 강도 높은 인간이며 잠재적인 인간이다”(비베이로스 데 카스트로 2015:69). 그러나 비베이로스 데 카스트로의 ‘인간’ 개념은 바로 ‘혼’으로 용해된다. 그것은 그것이 대상으로 삼는 개체에 조응하여 달라지는 것(다자연주의)이어야 한다.

스피노자의 부분(양태 혹은 오히려 개체)은 어떤 의미로도 라이프니츠의 모나드적인 ‘전체’를 가지는 것도, 인식하는 것도 불가능하다. 그렇기 때문에 그 개체에는 어떤 의미로도 자유의지도, 욕구능력도 인식되지 못하고, 또 그렇기 때문에 각 부분이 서로 같은 전체를 가지기 때문에 일어나는 비슷한 일도 일어나지 않는다. 모든 것은 필연 속에서 성립된다고 간주된다.

그렇다면 어떤 의미에서 이 프시케=animata는 특이적일까?

이 ‘신에 대한 정신의 지적인’ 사랑은 정신이 원인으로서의 신의 관념을 수반하면서 자기 자신을 관상(觀想)하는 움직임이다. 바꿔 말하면, 이 사랑은 인간정신이 설명하는 한에서 신이 자기의 관념을 수반하며 자기 자신을 관상하는 움직임이다. 따라서 정신의 이 사랑은 신이 자기 자신을 사랑하는 무한의 사랑의 일부분이다. (V, 36 증명)

이 귀결로서 신은 자기 자신을 사랑하는 한에서 인간을 사랑하며, 따라서 인간에 대한 신의 사랑과 신의 정신의 지적인 사랑은 같다. (V, 36계)

내재적인 (endo적인) 자기 안에서의 영원한 인식 가능성, 스피노자는 이것을 ‘제3종인식’이라고 했다.

여기서 신과의 일치는 전체와의 만남이 아니라, 특이적 및 영속적(즉 now here=no where이다) 부분과의 만남이다. 신의 일부로서 신이 개물(個物)인 나를 보는 것, 내가 신 안에서 나를 보는 것이 일치한다. 바로 ‘논증의 익명적 주체가 우리와 자기동일화해간다. 자기와 살고 있는, 그러나 표상도 재인(再認)도 없는 만남이다’(上野 1999:158). ‘우리의 정신의 눈이 검증 그 자체’(같은 책: 159)가 되어 검증하는 영원 안에서 우리 자신을 우리에게 보여주는 것이다. 이 신=자연과 양태 간의 양의성, 결정불가능한 반복가능성, 이 내재성이야말로 ‘endo’의 의미이며, 이것을 가능하게 하는 것이 특이적 프시케이다.

 

5. Endo-epistemology로

마지막으로 에피스테몰로지와의 관계에 대해 논하고자 한다. 이상의 논의는 거의 그 자체로 20세기 과학 및 과학에 대한 철학의 다양한 논의의 하나의 프레임으로 기능한다.

[그 속에서] 보편적 정신에 대응하는 것은 과학적 정신=과학적 방법이라는 정식에 기초하여 (그러나 각각에서 무엇을 과학적 정신으로 할 것인가에 대해서는 상이하다) 그 ‘복사본’인 개개의 과학자의 인식을 이해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고전적인 과학철학이 있다. 이것을 과학의 사회학의 ‘external approach’와 비교하면 ‘internal approach’로 부를 수 있다. 이에 따라 external과 internal이 다른 것처럼 보이지만, external이 근대사회에 관한 사회학적 분석을 기초로 할 때에 보편적 정신의 대응물을 과학적 방법으로서 뒤르켐적인 집단적 정신 혹은 초-정신성에서 구하는 것을 보면 그것 또한 보편적 정신의 구조인 것 자체는 변함이 없다.

프시케상의 혼에 대응하는 것은 각각의 계보에 따라 다양하다. 콰인(Willard van Orman Quine, 1908~2000) 이후의 자연주의, 파이어아벤트(Paul Karl Feyerabend, 1924~1994)의 방법 없는 과학이 이른바 정통파 과학철학 내에서 이에 대응하고, 프랑스계에서는 푸코 이후의 계보학적 권력분석이 대응하며, external에서는 앞서 본 사회과학의 근대성을 비판하는 라투르 이후의 과학기술인류학이 대응한다.

그렇다면 특이적 혼에 대응하는 Endo-epistemology란 어떤 것인가? 여기서 그 모든 것을 논하기에는 남은 지면이 얼마 없으므로 특징만을 간단하게 서술하겠다.

1. 모든 것은 부분이며, 모든 것은 부분에 (그것이 개물(個物)이라면) 정도의 차가 있지만 혼이 인식되는 것이므로, 인간과 자연의 사물 (혹은 문화적인 것과 물리적인 것)을 구별하는 어떠한 이유도 없는 양태(부분)이라는 점에서 그것들은 완전히 동등하다.

2. 모든 것의 특이적 프시케는 지와 의식뿐만 아니라 무지와 예속에 의해 특징지어진다. 오히려 스스로와 유사하지 않은 환원불가능한 타자와의 만남이야말로 바로 무지가 주제=질문화 될 수 있다. 특이적 프시케에서 의심되지 않는 것은 언제나 전제 없는 귀결에 불과하지만, 이것을 의심 불가능하게 하는 것이야말로 스스로를 다른 특이한 타자(1의 특징에 의해 인간으로 한정되지 않는다)와의 만남이다.

3. (수학과 논리학을 포함하여) 자연과학의 타당한 인식은 특이한 타자와의 만남 후에 형성되는 공통개념의 제2종 인식으로 간주된다. 그것이 타당한 한에서 그 인식은 진정한 관념을 이룬다. 이에 따라 그것은 신 가운데 있는 것이며, 개개의 관념인 한해서 신을 원인으로 한다. 즉 그 타당한 인식(재인(再忍)이 아니라 인식, 즉 관념의 형성) 자체 또한 자연=신의 산물이며, 양태가 되는 한에서 자연=신의 움직임 그 자체이다.

4. 3에서 논한 것과 같은 과학적 인식(타당한 개념 혹은 진정한 관념)을 실제로 과학자가 형성할 때에 3과 같은 자기인식을 반드시 수반할 필요는 없다. (이제까지는 필요하지 않았다). 그러나 이때 과학자라는 개체는 다양하고 특이한 다른 프시케와 함께 움직이며 무엇을 이루는지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그것이 필요하다.

5. 개개의 과학의 개개의 관념과 판단(긍정 및 부정) 그 자체는 신=자연의 산물로서 간주된다. 그러나 그것 자체의 인식은 특이적인 프시케의 반사적(내재적, 양의석) 비틀림에 의해서만 가능하다.

6. 진리(혹은 진정한 관념)는 신=자연의 양태화하는 논증(긍정 및 부정의 판단)이 구성되는 개개의 그 장소뿐이며, 그 이외의 어딘가에 있는 것이 아니다. 그러므로 발견해야 하는 진리도, 진리의 특권적인 범형(진리 외부에 있는 진리의 진리)도 존재하지 않는다.

이 조건 항목들은 크게 둘로 나뉜다. 하나는 Endo-episemology를 실제의 과학적 발견(즉 개개의 관념과 판단의 산출)의 장소나 역학계와 같은 어느 정도 체계화된 이론에 대해 실제의 사례 연구로 보여주는 것. 또 하나는 위의 조건 항목의 3을 필요로 하는 과학의 가능성에 대해 검토하는 것.

이상과 같이, Endo-epistemology의 시도는 과학에 관한 철학의 기술적인 논의이며, 단지 그것만이 아니라 동시에 탈보편적 정신의 실천이며, 따라서 ‘사고의 영속적인 탈식민화 운동’의 하나로 변모한다. 여기서 철학은 인류학의 이념과 불가분한 지점에 다다른다.

 

近藤和敬「普遍的精神から、ネットワーク状のプシューケーでなく、特異的プシューケーへ:思考の脱植民地化とEndo-epistemologyへの転回のために」『現代思想』2016年3月臨時増刊号。

 

※ 몇몇 군데의 중대한 오역을 바로 잡았습니다. '인공지능'과 같은 첨단과학이 사람들의 이목을 끄는 요즘, '애니미즘'을 불러오는 '존재론적 전회'가 인문학계의 전위적인 이론으로 등장한다는 것이 참으로 아이러니합니다. 이 '전회'가 앞으로 어떻게 전개될지에 대해서 관심을 가지고 계속 포스팅할 생각입니다.  (2016. 2. 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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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사상 2016년 1월호에 실린 아즈마 히로키의 2쪽짜리 글을 번역해올려둔다. 한때 일본의 포스트모던을 대표하는 비평가이자 인문학자였더랬는데.. 포스트모던의 기운이 다한 것처럼 그도 그렇게 보인다.   

 

 

인문학과 반복불가능성

아즈마 히로키(東浩紀)

인문학의 현재적 의의에 대한 주제로 원고 의뢰를 받았다. 평소 관심이 있는 주제이기 때문에 집필을 수락했지만, 필자의 문제의식이 본지의 독자들과 겹치지 않을지도 모르겠다. 필자는 연구자가 아니고 어느 대학에도 소속되어 있지 않다. 2015년에는 ‘문학부의 위기’가 어느 때보다 부각되었던 해였는데, 필자로서는 사태의 본질이 대학교원의 고용문제에만 있다고 생각하지 않아서 크게 관심을 두지 않았다. 인문학은 반드시 대학에 소속될 필요가 없다.

그렇다면 본래 인문학이란 무엇인가? 다양한 정의가 있겠지만, 필자는 그것을 반복불가능한 역사를 파악하는 지식이라고 생각한다. 반면 자연과학은 반복가능한 사상을 다루는 지식이라고 생각한다. 좀 더 정확하게 말하면, 반복불가능하게 보이는 현상을 반복 가능한 틀로 포착하는 그것이야말로 자연과학의 본질이라고 생각한다. 다윈주의는 역사를 파악하지 않았는가 라는 반론이 제기될 수 있는데, 요시가와 히로마(吉川浩満)의 『理不尽な進化: 遺伝子と運のあいだ』[불합리한 진화: 유전자와 운 사이](朝日出版社, 2014/10/25)에서 지적한 대로, 진화론이야말로 그 반복가능성과 반복불가능성의 모순을 양쪽으로 가르는 학문이며, 그에 따라 자연과학의 본질이 드러나게 되었다.

인문학자는 ‘이 역사’를 단 한 번의 기적으로 파악한다. 따라서 인문학자는 우연으로밖에 생각하지 않는 역사의 세세한 부분까지 중시해야 하고, 전통을 계승하는 것만으로는 앞으로 나아갈 수 없다. 이에 비해 자연과학자는 ‘이 역사’를 무한의 반복 속에서 하나의 사례, 통계 속에서 하나의 샘플로 해석한다. 그들에게 본질은 역사가 아니라 역사를 계산하는 원리이다. 따라서 우연의 사건은 ‘노이즈’로 배제될 수밖에 없고, 교과서는 새로울수록 좋다고 생각한다. 인문학과 자연과학의 제도와 관습의 차이는 기본적으로는 이 차이로 귀결된다.

이와 같이 정리하면 분명해지는 것이 있다. 인문학과 자연과학은 어느 쪽이 올바른가, 어느 쪽이 우위에 있는가 라는 그런 문제가 아니다. 인간은 보편을 인식할 수 있지만, 실존으로서는 단지 한번밖에 살 수 없다. 인류는 보편적인 인식에 도달할 수 있지만, 그 인식은 하나의 역사로 걸어갈 수밖에 없다. 인문학과 자연과학의 ‘대립’은 이와 같은 인간의 실존 구조 그 자체에서 만들어지는 것이며, ‘학제적으로’ 운위된다고 해서 그것을 뛰어넘을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인간은 인문학만으로 살 수 없다는 것과 마찬가지로, 자연과학만으로 살 수 없다. 본래 자연과학은 본질적으로 완전한 것이 아니다. 반복 가능한 사상(事象)을 다루는 자연과학과, 그것 자체가 반복 불가능한 ‘유럽 근대’의 산물이라는 모순 앞에서 일찍이 후설은 『유럽의 제 학문의 위기와 초월론적 현상학』에서 이 문제를 다루었고, 또 데리다도 그 책의 부록해설논문에서 『기하학의 기원 서설』로 주제화했다.

그렇다면, 다시금 의뢰받은 주제로 되돌아와서, 인간이 인간인 한에서 인문학은 사라지지 않는다는 것이 필자의 생각이다. 인문학이 단 한번 ‘이 역사’ 속에서 문화를 구축하는 한에서, 자연과학이 발달하여 세계의 물리적 제도력을 증강시킨다 해도 인문학의 전통이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가령 인간이 생물학적으로 인간이 아니게 되고 의식이 정보가 되고 기억이 복제가능하게 되고 ‘나’의 수가 무한히 증식가능해진다 해도, 그 속에서 ‘이 나’가 있는 한, 문학과 철학은 사라지지 않는다. 그 점에서 인문학의 미래는 보증된다. 인문학을 필요로 하는 인간은 반드시 존재한다. 다만 그 종사자가 앞으로 지금과 같은 노동환경을 향유할 수 있을까, 20세기와 같은 사회적 영향을 다시 회복할 수 있을까 라는 것에 대해서는 보증할 수 없다.

인간이 인간인 한에서 인문학은 사라지지 않는다. 그러나 그것은 뒤집어보면 자신이 인간이라는 것을 자각하지 않는 인간에게는 인문학은 거의 가치가 없는 것이기도 하다. 그리고 어느 시대에도 거의 모든 인간은 자신이 인간이라는 것을 자각하지 않는다.

 

(東浩紀「人文学と反復不可能性」『現代思想』2016年1月号)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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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날의 인류학 지형도

레비-스트로스에서 ‘존재론의 인류학’까지

 

1. 계승되는 구조주의

인류학은 ‘인간’이라는 종에 속하는 주체가 자신의 존재와 활동을 이해하기 위한 재귀적인 지(知)의 실천법이다. 인류학자는 시간축을 통해 자신의 기원인 생명사와의 관계를 탐구하는 한편, 공간축을 통해 미지의 ‘타자’를 발견해낸다. 이 방법은 인간성의 이해를 목표로 하는 인문과학으로서 실로 모순과 긴장을 내재하는 질문을 포함한다. 왜냐하면 인류학은 총체로서의 인류를 전(前)인류학적인 생물의 역사와 연결 지음과 동시에, ‘문화’라는 활동영역을 획정함으로써 인류를 생물계로부터 떼어놓기 때문이다. 이에 따라 인류학은 항상 연속성과 비연속성이라는 이중의 기준을 자연사 속에서 표명해왔다. 요컨대 인류학의 학지(學知)는 자연계에서 태어난 생물의 일부이면서 그것으로부터 분리된 것이기도 한 인간의 모순적인 조건을 드러낸다.

이때 문화는 자연의 일부로 세계에 내재하면서도 스스로 차이를 만들어내어 인간집단의 독자성을 산출하려는 실천과 결부된다. 문화는 연속성의 계열에서 자연계에 숨겨진 미발견의 정보를 추출하고 스스로를 다른 사회와 차이화하는 조작자로 활동한다. 또 다른 한편에서 문화는 자연계에 발생한 생명의 연속성을 부정하고 ‘문명’이라 부르는 집약화된 환경의 얼개를 드러내는 원리와 관계한다. 후자는 자신의 세력을 공간적으로 확장할 뿐만 아니라 시간적으로 자신과 자연의 연속성을 은폐한다. 이 은폐작용에는 타자를 문명권으로부터 배제하려는 모든 지적 조작이 포함되며, 문명인은 바로 이 조작에 의해 자신의 존재기반과 다른 조건을 살아가는 타자를 배제하거나 정치경제적으로 이용해왔다. 클로드 레비-스트로스에 의하면, 인류학은 문명의 고질병인 이러한 은폐작용에 저항하는 지혜의 계보학을 계승하는 학문이자, ‘문명과 야만의 대립’을 넘어서야 하는 과제를 최초로 받아들인 학문이다.

인류의 모든 문명에 은폐된 생명과정의 연속성과 비연속성이라는 문제는 특히 레비-스트로스의 신화연구에서 주요하게 다뤄진다. 1955년에 발표한 『신화의 구조』를 시작으로 그의 신화연구는 보아스(Franz Boas, 1858~1942, 미국의 인류학자)류의 정밀한 신화연구의 기본자세를 계승하는 한편, 이 문제와 씨름하기 위한 기초를 다졌다. 예를 들어 레비-스트로스가 1967년에 발표한 논문 「아스디왈 이야기」(Claude Levi-Strauss. 1967. "The Story of Asdiwal", in Leach, ed., The Structural Study of Myth and Totemism, London: Tavistock, pp. 4-7) (Claude Levi-Strauss. 1973. "La geste d'Asdiwal", Anthropology structurale deux, Paris: Plon)에는 태평양 연안의 캐나다 선주민인 치므시 족(Tsimshian)에서 계승되는 다양한 세계인지의 틀을 ‘도식’(schema)으로 추출해내고 여러 지역의 전승과 비교함으로써 신화의 교환구조를 해명하고자 했다. 이 연구는 지리적, 사회학적, 우주론적, 기술ㆍ경제학적이라는 네 개의 도식에 따라 선주민의 생활 속에서 경험되는 무의식의 논리를 검토하고 개인과 사회와 언어집단을 넘어서는 인지공간의 양상을 지도화했다. 신화는 집단 간에 공유되는 신화소의 관계에 기반하여, 자연계의 일부로 존재하는 제 사회의 의미론적인 공통성과 차이를 반복하며 치환, 병치, 역전의 신화소의 교환조작을 통해 인간과 비인간을 관통하는 연속성과 비연속성을 ‘의미하는 것’ 안으로 직조해넣는다. 이 섬세한 기술에 의해, 이를테면 영웅 아스디왈, 소녀로 변신한 흰곰, 스키나 강 계곡, 나스 강, 천상계와 지상계, 여름과 겨울 등 표면적으로는 별개로 존재하는 것처럼 보이는 사상(事象)이 신화로 편입된다. 

연속성과 비연속성의 배치를 둘러싼 레비-스트로스의 관심은 그 후 토테미즘이라는 인류학적 개념을 재고하는 두 연구(『오늘날의 토테미즘』과 『야생의 사고』)(※이 두 저작은 1962년에 출간되었으므로, 실제로는 「아스디왈 이야기」보다 앞선다.)를 거쳐 보다 진일보한 단계로 나아간다. 이 저작들에서 그는 오스트레일리아, 아프리카, 남북아메리카의 민족지를 두루 참조하면서, 인간을 다른 생물ㆍ무생물과 동일시하는 것을 이론적 오류로 보았던 옛 토테미즘을 넘어서고자 했다. 그는 이제까지 민족학자[인류학자]가 종교적 환상으로 간주해왔던 ‘토테미즘’이라는 사고방식에서 자신의 분류체계에 기초하여 인간과 비인간의 기호적 관계를 재구축하는 역동적인 지적 실천을 발견해낸다. 즉 레비-스트로스에 따르면, 각지의 선주민은 ‘토템’이라는 살아있는 기호를 조작매체로 하여 종과 개체, 기호와 신체를 연결하는 가치환원을 현실화해왔고, 이를 통해 ‘다수성의 통일체[동식물의 다양한 종이 만들어내는 자연의 체계]’에서 ‘통일체의 다양성[인간이라는 하나의 종 내부의 다양성]’을 이끌어내어 자연과 문화라는 서로 다른 인식론적인 위상을 전환할 수 있었다. 그는 이것을 문명권의 ‘길들여진 사고’에 대치하여 ‘야생상태의 사고’로 규정한다. 토테미즘이란 바로 이 ‘코드’들을 횡단하여 인간(문화)과 비인간(자연)이라는 두 개의 차이체계 간의 상동성(相同性)을 추출하는 종(種)의 철학이다, 라고 레비-스트로스는 생각했다.

『야생의 사고』가 이끌어낸 ‘철학자 없는 철학’ 혹은 ‘인류최고의 철학’의 탐구는 그 후 인류학자뿐만 아니라 모든 영역의 지성에 충격을 주었다. 레비-스트로스는 그 후 십수년에 걸쳐 아메리카선주민의 신화연구를 이어갔고, 그 성과로서 자연과 문화를 관통하는 포괄적이고 다원적인 생명기호론의 맹아가 촉진되었다. 구조주의는 이를테면 세계각지의 무수한 선주민 사상을 상호 연관 짓는 다원론의 필드로서, 그 이후에 오는 존재론적 인류학의 요람을 예비한다. 구조주의는 살아있는 문화를 죽어있는 상징성의 차원으로 끌어내리는 방식이 아니라, 자연과 문화를 종횡으로 관통하는 역동적인 기호변환의 사고로서 계승되고 있다.

 

2. 『신화학』에서 ‘퍼스펙티브주의’로

레비-스트로스의 구조주의는 문화적 활동의 다양한 측면을 세분화하고 그로부터 인간상을 재구축하는 문화인류학의 전통 속에 뚜렷한 특이성을 던져놓는다. 그것은 『슬픈 열대』의 마지막에 ‘세계는 인간 없이 시작되었으며 인간 없이 끝날 것이다’라는 불가사의한 문장에서도 분명하게 알 수 있다. 그는 다음 세기의 사변적 실재론의 선구자로서 인류발생 이전의 세계 또는 인류멸망 이후의 세계에 지식활동의 근거를 위치 지었다. 레비-스트로스에 따르면, 인문과학의 사명이란 인간상을 구축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것을 해체하여 말하자면 ‘인류이전’과 ‘인류이후’에 연속하는 물(物)의 세계로 용해시키는 것이다. 그러나 이때 물(物)이란 관념의 세계와 대척하는 균질적인 질량의 세계가 아니라, 이를테면 재규어, 들고양이, 금붕어, 요괴, 개미, 제비꽃, 바람, 카누, 금성 등이 북적거리는 세계이다. 요컨대 뇌와 물질, 생물과 무생물, 기호와 환경의 차이를 넘나드는 드넓은 실재의 세계에 다름 아니다.

프레데릭 켁(Frédéric Keck)이 지적한 것처럼, 레비-스트로스의 두 권의 토테미즘 연구에 나타나는 ‘주체의 용해(분해)’라는 과제는 그 후의 신화연구에서 철저한 애니미즘 연구로서 실행된다. 『신화학』에서는 다수의 신화텍스트가 ‘변환’(transformation)이라는 관점에서 분석되는데, 거기에는 다양한 신화소를 통해 주체의 개념을 변형하여 ‘분자적인’ 차원에까지 용해시키는 조작을 포함한다. 이 조작은 초기 신화연구의 ‘도식’(schema) 개념에서 좀 더 복잡한 가치조작을 가능하게 하는 ‘코드’라는 개념으로 변천된다. 이 변천은 특히 『야생의 사고』에서 전개된 신체와 종의 관계를 추적하는 다원론적인 이해의 성과이며, 이 이론의 풍요성은 오스트레일리아 선주민의 성물(聖物)인 츄링가를 둘러싼 우주론적인 해석에서 남김없이 발휘된다. 그 후 집필한 『신화이론』에서는 신화분석의 대상이 남북아메리카대륙의 선주민 사회라는 영역으로 옮겨간다. 이 속에서 그는 ‘사회학적 코드’, ‘계절의 코드’, ‘천문학적 코드’, ‘동물학적 코드’, ‘청각적 코드’, ‘후각적 코드’, ‘경제=기술적 코드’ 등의 다양한 코드를 구사하며 자연과 사회를 횡단하는 선주민사회의 사상을 탐구한다.

1950년대의 ‘도식’에서 ‘코드’로의 분석적 방법론의 전환은, 근린의 부족 간의 생태문화를 비교하는 한정적인 연구에서 나아가 보다 광역적인 집단 간의 생태와 그 생산물인 신화 텍스트 간의 비교연구를 가능하게 했다. 또한 『신화학』에서는 데스콜라의 ‘토테미즘 사회’ 연구에서 다뤄진 다양체 구조의 분석방법이 전면화해서, ‘애니미즘 사회’라는 보다 큰 문제계가 등장한다. 켁이 말한 것처럼, 여기에는 레비-스트로스가 『야생의 사고』에서 논한 주체화의 문제와는 또 다른 문제가 나타난다. “즉, 토템적인 주체에서는 미분차이적으로 배분되는 질(質) 전체를 통해 개체를 집합적인 주체에 귀속시키는 것이 문제인 것에 비해, 애니미즘적 주체에서는 신체의 불연속성을 통해 혼의 연속성을 지각하는 것이 문제이다.” 이와 같은 연속성과 불연속성의 배치는 반드시 자연/문화의 이항대립을 전제로 하는 것이 아니라, 그 외의 다양한 대립항과 ‘코드의 변환작용’에 의해 미끄러지듯 횡단하는 기호 활동의 특징을 나타낸다.

레비-스트로스의 세대를 제2차 세계대전의 프랑스 인류학의 제1세대로 한다면, 1968년 이후 소위 ‘포스트구조주의사상’의 대두에 직면하여 그에 동참했던 피에르 클라스트르와 모리스 고들리에는 이른바 ‘제2세대’의 인류학자에 해당한다. 그들은 마르크스주의와 라캉파 정신분석학의 세례를 받았고 파라과이와 뉴기니아에서 민족지조사를 수행했으며 이 성과를 바탕으로 구조주의를 비판적으로 넘어서고자 했다. 이 세대의 기본적인 문제의식은 상징적 교환의 우위를 설파하는 구조주의에 대해 미개사회의 폭력의 메커니즘 혹은 전제국가적인 정치네트워크를 내세우거나(클라스트르), 증여와 교환을 지지하는 사회의 상상적 차원의 균열에 착목함으로써 교환불가능한 ‘성스러운 것’의 기원에 도달하는(고들리에) 것과 같이, 구조주의에 대항하는 접근에 있었다. 1970년대에서 80년대에 걸쳐 출간한 들뢰즈와 가타리의 ‘자본주의와 분열증’ 시리즈에 클라스트가 깊은 영감을 주었고, 고들리에는 더 나아가 1990년까지 ‘상상적인 것’에 관한 이론화를 진행하여 경제인류학에 큰 전환을 기도했다. 그런데 이와 같이 젊은 세대가 학문영역을 넘나들며 ‘구조주의’에 대치했던 그 당시에 정작 레비-스트로스는 작자미상의 음악을 뽑아내는 악인(樂人)처럼 무수하게 생성되는 신화의 해석에 몰두한다. 1971년 네 권의 대작 『신화이론』을 쓴 후에 그는 『소신화이론』이라고 불리는 아메리카대륙의 선주민 신화연구에 착수한다. 그러나 그의 고독한 산책길은 착종하는 길목에서 후속세대의 착상과 교착하게 된다. 

1980년대에서 90년대에 걸쳐 필리페 데스콜라와 에두아르도 비베이로스 데 카스트로(Eduardo Viveiros de Castro) 등의 ‘전후에 태어난 세대’의 인류학자들이 맹활약을 펼치게 되는데, 그들은 오히려 레비-스트로스의 광범위한 연구에서 미발견된 철학적/인류학적 발상의 맹아를 추출하려는 새로운 조류를 만들어낸다. ‘전후 제3세대’에 속하는 이들은 언어학과 인류학을 석권했던 ‘구조주의’에 대해 ‘포스트구조주의’의 다양한 신사상을 대립시키지 않고, 오히려 양자를 적극적으로 매개하여 독자적인 방식으로 종합하는 공통점을 갖는다. 그들은 구조주의 이후의 인류학의 주요 관심사였던 주체화의 이론과 인지인류학의 성과를 경유하여, 나아가 영미계의 인류학자를 중핵으로 하여 1980년대의 민족지학을 석권했던 ‘포스트모던 인류학’의 바람을 맞으면서도, 당시 시대에 뒤쳐진 것으로 여겨졌던 구조주의의 성과를 재검토하여 차세대의 문제계를 장악해간다.

예를 들어 데스콜라는 1976년부터 2년 반에 걸쳐 에콰도르의 아추아르(Achuar) 사회에서 현지조사를 행한다. 그는 그때까지 ‘한 번도 손대지 않았던 자연’이라고 여겨졌던 아마존 밀림이, 실은 선주민이 동식물을 비롯한 생태환경에 손을 가해서 구축해온 것임을 발견해낸다. 아추아르족은 수렵대상의 특정 동물과 화전대상의 재배식물과의 관계를 친족관계의 네트워크에 비유하여 다양한 생물종 사이에 사회적인 아날로지를 형성해왔다. 이 상징적인 실천의 그물코를 통해, 그들은 야생영역과 인간의 거주공간을 매개하는 광대한 인터페이스로서 삼림생태계를 구축ㆍ유지해왔던 것이다(『길들여진 자연』<La Nature domestique: symbolism et praxis dans l'écologie des Achuar> 1986년). 데스콜라는 나아가 레비-스트로스류의 시적문체를 이어받아 『황혼의 창(槍)』(<Les de crépuscule. Relations jivaros, haute Amazonie> 1993년)을 저술하고, 문학적 표현ㆍ철학적 모색ㆍ사회과학적 상상력을 연결하는 유니크한 서술스타일을 선보였다. 그리고 2005년(영어판은 2013년)에 발표한 『자연과 문화의 저 너머』(<Par-delà nature et culture>)에서 그는 자신의 조사를 포함하여 전세계의 민족지를 검토하는 분석개념으로서 ‘내부성’(intériorité)과 ‘신체성’(physicalité)이라는 두 개의 분석항을 설정하고, 각각의 계열을 연속성/비연속성에 따라 네 개의 변환가능한 유형(‘자연주의’, ‘유추주의’, ‘토테미즘’, ‘애니미즘’)을 추출해낸다. 데스콜라는 이 모델을 통해 이를테면 미셸 푸코류의 지(知)의 계보학과 레비-스트로스의 구조론을 융합시키는 밀도 높은 논의를 전개한다. 이리하여 연속성/비연속성의 위상에 숨겨있는 존재론적인 조건을 밝히는 변환의 학문으로서 인류학은 세계각지에 전승된 예지를 총합하여 새로운 출발지점에 서게 된다.

데스콜라와 동시대에 지적형성기를 거쳐 1970년대 후반에서 80년대 전반까지 브라질에서 인류학적 필드워크를 행한 비베이로스 데 카스트로 또한 현대의 ‘존재론의 인류학’을 대표한다. 그는 야왈라피티(Yawalapiti)라는 브라질의 선주민 사회에서 민족지조사를 수행하였고, 레비-스트로스의 『신화학』의 구상을 계승하여 아메리카 원주민의 잠재적인 우주론을 재구축하고자 했다. 이 지적작업을 수행하면서 그는 들뢰즈와 가타리의 사상을 다양한 각도에서 참조한다. 특히 그는 『안티 오이디푸스』와 『천개의 고원』에서 인용한 20세기 인류학의 축적을 인류학의 필드로 되가져와 검토한다. 비베이로스 드 카스트로는 이때 구조주의적인 분석의 틀을 확장할 뿐만 아니라 포스트구조주의의 성과인 다원적인 존재생성론을 인류학의 영역에 도입함으로써 세계 인류학계에 큰 충격을 안겨주었다. 그의 자세는 ‘세계는 관점의 다양성에서 구성된다’고 생각하는 아마존의 선주민 사상을 급진화해서 탐구하는 것이다. 그는 이 사상을 ‘아메리카 대륙 선주민의 퍼스펙티브주의’라고 부르고 다른 아메리카사회에까지 확장하여 주체와 객체를 소여의 전제로서 시작하는 일체의 철학과 대치시킨다(Cosmological Deixis and Amerindian Perspectivism in The Journal of the Royal Anthropological Institute, Vol. 4(3), 1998).

비베이로스 데 카스트로에 의하면, 아메리카 대륙 선주민의 우주론적 사상에서는 관점의 다양성이 주체의 다원적인 존재방식을 결정하며, 그 반대가 아니다. 따라서 예를 들어, ‘먹는 자(포식자)’와 ‘먹히는 자(피포식자)’의 관계는 생태계에 새겨지는 비대칭의 존재론적인 긴장을 낳는데, 이 비대칭성은 고정적인 것도 절대적인 것도 아닌 복수의 그물코의 결절점에서 구현된다. 예를 들어, 어떤 동물에게 포식자가 다른 동물에게는 피포식자이기 때문에 포식관계에 따라 주체와 객체의 위치가 항상 변전된다. 나아가 초자연의 정령이라는 제3자의 관점을 우주론에 편입시킴으로써 주체 간에 교착하는 관점의 그물코는 선조와 동물혼령 등의 영역에까지 확장된다. 모든 존재는 각각 별개의 신체를 가짐으로써 그 특이성을 세계에 표출하는데, 그와 동시에 그 개체의 주체성(정신성)을 맡는 것은 신화시대의 모든 존재로 분유되는 초기조건으로서의 ‘인간성’이며, 인간은 단지 이 인간성을 지금까지 갖고 있는 것만으로 다른 동물들 일반과 차이화된다. 즉 일찍이 모든 생물이 공통문화로서 ‘인간성’을 가졌던 것인데, 시간의 경과와 함께 복수의 경로에 따라 그것을 잃거나 몰래 감춘 우주론적 사상이 아메리카 대륙 선주민에게 공유되어왔다고 비베이로스 데 카스트로는 말한다.

비베이로스 데 카스트로가 아메리카 대륙 선주민의 사상으로 추출한 ‘퍼스펙티브주의’는 그 후 덴마크의 모르텐 페데르센(Morten Axel Pedersen)과 레인 윌러슬레브(Rane Willerslev)에게 계승되어 아메리카 대륙에서 베링거 해협을 넘어 축치(Chukchi, 시베리아 동북부 축치반도의 소수민족), 유카기르(Yukaghir, 시베리아 동북부 지역의 소수민족), 몽골에 이르는 시베리아와 북아시아 사회에까지 적용된다. 신체를 구체적인 관점의 거처로 삼으면서 ‘퍼스펙티브가 주체를 결정한다’라는 ‘퍼스텍티브주의’의 이론은, 결코 범세계적인 보편사상도 애니미즘적 사고의 필요조건도 아니지만, 그 후의 전개과정에서 아메리카 대륙과 유라시아 대륙을 연결하는 잠재적인 사상의 거처를 비추며 인간과 동물, 정령적 존재의 상호관계를 재고하는 새로운 인류학 연구를 촉진해왔다. 나카자와 신이치의 말을 빌리면, 이러한 사상연구는 “《세계성》가운데 인간을 위치 짓는 새로운 과학”의 일환으로서 미래의 인류학을 개척하는 가능성을 간직한 것이 아닐까?

 

3. ‘대단절’을 넘어서는 과학인류학

데스콜라는 레비-스트로스의 ‘자연과 문화의 이항대립’이라는 도식을 전제로 한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 발생조건을 발굴해내는 ‘자연의 인류학’으로 향했다고 한다면, 비베이로스 데 카스트로는 ‘자연과 문화의 이항’에 잠재되어 있는 역학에 착목하여 그 근본적인 전제로서 자연의 단일성과 절대성을 전복한다. 비베이로스 데 카스트로는 민족지에서 재구성된 사상(思想)으로서, ‘유일의 문화와 다수의 자연’을 조합하여 성립하는 ‘다자연주의’가 존재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 그리고 그는 이것을 ‘유일의 자연과 다수의 문화’로 조합하는 서양의 일반적인 상식(다문화주의 내지는 단일자연주의)에 대치한다. 이 이론적인 틀의 배경에는 레비-스트로스의 아메리카 선주민의 우주론 연구, 라이프니츠에서 니체를 거쳐 들뢰즈에 이르는 철학적인 다원론이 있는데, 무엇보다 브뤼노 라투르(Bruno Latour)가 개척한 ‘과학인류학’의 성과와 밀접하게 연관된다.

라투르는 데스콜라와 비베이로스 데 카스트로와 마찬가지로 철학에서 출발하여 아프리카와 아메리카에서 경험적인 필드워크를 거쳐 보편적인 문제계를 묘사하는 철학적 인류학으로 회귀한다. 흥미로운 것은 데스콜라가 아마존의 민족지 연구에 몰두한 1970년대 후반, 라투르는 스티븐 울가(Steven Woolga)와 함께 과학자의 실험실 생활에 대한 미시사회학적인 조사를 실시했다는 점이다. 라투르는 실험실에서 연구자에 의해 다양한 작용이 가해지는 연구대상과 더불어 그 연구가 어떻게 행해지는지의 상호행위와 합리적 설명과정에 착목함으로써 ‘재귀적 민족지’(reflective ethnography)라 칭하는 과학실험을 둘러싼 연구실천의 수법을 확립한다(『실험실의 생활―과학적 사실의 사회적 구성』<Laboratory life: The Social Construction of Scientific Facts> 1979년). 이 초기의 민족지적 연구는 일상적인 사회상식을 구성하는 다양한 미시적인 코드를 탐구하는 에스노그라피의 방법론으로 실시되었는데, 관찰자와 피관찰자를 둘러싼 권력관계뿐만 아니라 쌍방이 관여하는 물(物)(비인간)의 세계에 착목함으로써, 후년의 과학인류학을 개척하게 된다.  

그 후 라투르는 모국인 프랑스를 대표하는 19세기의 세균학자인 루이 파스퇴르의 실험실 연구를 둘러싸고 ‘과학자들이 어떤 방식으로 다층적인 현실영역을 오가며 물(物)의 세계와 말의 세계를 매개해왔는가’ 라는 문제를 정밀하게 그려낸다. 또 1970년대 파리에서 계획된 그러나 실제로는 실현되지 않고 실패로 끝난 ‘컴퓨터로 제어하는 지하철 계획’(“아라미스 계획”)을 주제로 삼아 고도의 과학기술에 기반한 현대사회가 어떤 방식으로 사회적인 세계의 너머에 있는 물(物)을 동원하여 산업화된 공간에 가치를 실현하려 하는가라는 문제의 분석을 시도한다. 이러한 실천을 바탕으로 라투르는 인간뿐만 아니라 ‘비인간적인 것’의 영역으로 확장되는 행위주체의 네트워크로서 사회들을 파악하는 이른바 ‘행위자-네트워크 이론’(ANT)를 창안한다. 그것은 산업사회의 수많은 기술적 매개를 일종의 비언어적인 해석과정으로 간주하고 사회로부터 격리된 실험실과 기술시험장을 상호행위로 넘쳐나는 인간적인 의미의 공간으로 다시 불러들이는 시도이며, 나아가서는 근대주의가 전제로 하는 ‘자연과 문화의 대단절’을 넘어 물(物)의 민주화와 공공화에 기반한 새로운 공통세계를 구상하려는 시도이다.

라투르에 따르면, 인류학적인 연구를 행하는 사람들의 사회도, 그 대상이 되는 ‘미개’와 ‘전근대적’이라고 불리는 사회도, 본질적으로는 그 무엇도 다르지 않다. 존재하는 것은 인간적인 것의 영역(사회)과 비인간적인 것의 영역(자연)을 나누려는 ‘순수화’의 힘과 양자를 연결하는 ‘매개’의 힘이며, 이 양극 사이에는 언제나 인격과 물(物)의 영역을 오가는 하이브리드한 존재가 꿈틀거린다. 다른 점은 매개의 방법일 뿐이며, 그것은 분석자에 따라 다른 형태를 취할 뿐이다. 사람들은 물(物)의 ‘상징적 차원’과 사회의 ‘자연적 차원’ 사이를 오가며 때로는 실재론자로 불리고 때로는 구성론자로 불린다. 여하간 우리들은 이 양극으로부터 구성되는 인식론의 세계에서 한 치도 벗어날 수 없다. ‘존재론적 차원’이란 인식론에서 떨어져나와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적인 것의 영역과 비인간적인 것의 영역의 힘의 조정이며, 본질에 앞서 주어지는 수직적인 현실성에 있다. 우리들은 이 양극 사이에 살고 있으면서 각각의 차원에 둘러싸여 ‘자연’, ‘언어’, ‘사회’, ‘존재’라는 항목의 네트워크를 조직하고 또 이것을 풀어냄으로써 그 다음의 네트워크를 구축하는 실천에 참여한다. 이것이 라투르가 말하는 ‘가동적인 존재론’이다. 그는 이러한 네트워크를 성실하게 추적함으로써 사회와 자연을 연결하는 현실성의 심도를 측정할 수 있다고 말한다.

비베이로스 데 카스트로가 논한 것처럼, 이 절차를 통해 이를테면 레비-스트로스가 『신화이론』에서 그려낸 아메리카 선주민 신화의 변주관계를, 과학자가 다양한 방식으로 정보와 이미지를 연결해가는 ‘참조=기준의 순환’의 네트워크와 비교가능하다. 이때 전근대적인 지식체계로서의 신화는 근대적인 지식체계로서의 과학 및 철학에 대치되지 않는다. 그것이 아니라, 신화에도, 과학과 철학에도 코드에서 다른 코드로 교환되는 ‘존재론’의 척도가 동일하게 존재하며 번역과 매개의 과정에 따라 이것들을 상호 관련짓는 현실성의 기준의 위치가 정해진다. 인류학자가 조사지에서 만나는 신화와 의례의 맥락에도, 자신의 출신지인 선진국의 과학과 산업기술의 맥락에도 동일하게 ‘비근대’의 차원이 존재하며, 인간과 비인간의 경계를 넘어서는 하이브리드한 현실 바로 거기에서 증식된다. 그리하여 인류학자는 사회와 자연 사이에 증식하는 하이브리드를 물(物)(미셀 세르가 말하는 ‘준-객체’)의 네트워크를 통해 자신에게 친숙한 사회와 현지사회 사이에 축척을 달리하는 동형의 문제군을 발견할 수 있다. 이러한 재귀적인 지적 실천을 라투르는 ‘인류학의 대칭화’로 명명한다.

 

4. 포스트다원주의와 ‘존재론적 전회’

라투르, 데스콜라, 비베이로스 데 카스트로 등의 인류학자가 필드워크에 기반한 구체적인 고찰에서 일반화된 비교인류학적 고찰로 향했던 1980년대에는 일반적으로 민족지적 기술의 정당성(실재성)을 둘러싸고 다양한 각도에서 비판이 전개되어 ‘표상의 위기’가 표출되었다. 『문화를 쓴다』를 저술한 제임스 클리포드와 존 마커스 등의 인류학자는 조사자와 피조사자 간의 비대칭적 관계를 자명한 전제로 삼았던 인류학의 현실성을 의심하고 전통적인 민족지적 기술의 권위를 비판적으로 넘어서려는 새로운 스타일을 모색한다. 이 시대는 근대주의적인 인류학의 민족지적 현실성이 뒤흔들리는 수난의 시대였다고 말할 수 있다. 그러나 다른 관점에서 보면, 이 시대는 기존의 포맷에서 탈출하는 전위적인 민족지의 실험이 행해진 시대이기도 한다.

이러한 시대에서 정치적인 반성이나 이론적인 자숙에 머무르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누구보다도 과감하게 조사대상사회와 관찰자의 대칭화라는 과제를 받아 안은 이들이 있었으니, 그들이 바로 메릴린 스트래선(Marilyn Strathern), 알프레드 젤(Alfred Gell), 로이 와그너 등의 멜라네시아(특히 뉴기니아)와 폴리네시아를 현지조사한 인류학자들이다. 데스콜라와 비베이로스 드 카스트로의 초기 모노그라프가 아마존이라는 필드를 모태로 하여 성립했고 그 성과가 일반적인 문제계로 확장된 것처럼, 스트래선을 비롯한 영미의 인류학자들은 태평양제도에서 자신이 수행한 조사를 다른 인류학자의 민족지 및 역사적 기록과 대조하면서 하나의 사회에 내재하는 복수의 현실의 기준을 정립했다. 나아가 그들은 이것을 타 지역의 다양한 기준과 비교함으로써 오늘날의 ‘포스트다원주의’라 불리는 논의의 토양을 구축했다.

예를 들어, 스트래선은 멜라네시아 사회의 젠더에 관한 획기적인 연구성과인 『증여의 젠더』<The Gender of the Gift: Problems with Women and Problems with Society in Melanesia>(1988년)에서 성인남자가 결사체에 가입할 때 필요한 입사식 의례에 관한 기존의 인류학적인 논의를 재검토한다. 그녀는 '전사회적인 자연의 영역을 여성성으로서 배제하고 남성적인 사회성의 영역에 가입한다'는 서양 인류학자의 설명에 의문을 제기하고, 그와 같은 자연/사회의 분할이 용해되는 지평에서 가입자들이 자기의 신체를 발견하고 성장력을 인식하는 기회로서 의례가 존재한다는 것을 밝혀내었다. 스트래선은 이 절차를 통해, 각각의 부족사회에 숨겨진 문화의 고유한 역사적 맥락과 가입자 개개의 신체에 숨겨진 성장력을 다원적으로 매개하는 ‘멜라네시아적 사회성’을 상정하고, 이것을 만들어내는 다양한 현상들을 생생하게 그려내었다.

나아가 스트래선은 이후에 저술한 『부분적인 연결』에서 멜라네시아 연구의 민족지를 종횡으로 참조하면서 각각의 사회에서 인공물이 어떠한 방식으로 멜라네시아 일대의 우주론에 접속되는가라는 문제를 탐구한다. 이를테면 ‘완토아트(Wantoat, 파푸아뉴기니의 지역) 의례의 피규어(인형조형물)가 바다를 건너 카누로 변환하고 나아가 파푸아뉴기니 고지대에서 널리 관측되는 남성비밀결사의 피리로 이어진다’는 횡단적인 이론이 실연된다. 그러나 그녀는 이러한 사회에 내재하는 인공물의 현실성의 기준을 전근대적이고 특수한 인류학적 용어의 범주로 남겨두는 대신, 도나 해러웨이(Donna Jeanne Haraway)가 기계와 생물의 혼합체로 그려낸 ‘사이보그’라는 아날로지를 통해 설명한다. 스트래선은 말하자면 사이보그 개념을 멜라네시아 사회의 분석에 적용함으로써 비교민족지학이 직면한 ‘통문화적인 막다른 골목’을 돌파하고 유기체와 인공물의 접속에 의한 신체의 확장이라는 차원을 새롭게 조명한다. 그리하여 그녀는 가치환원적인 ‘비교가능성’을 넘어 신체라는 개념을 갱신하는 이론적인 실험을 감행한다.

인격과 사물과 자연을 현대의 서구사회는 일반적으로 동일한 척도로 측정하지 않는다. 그런데 이 존재의 계층들을 멜라네시아의 사람들은 어떻게 해서 경계를 넘나들고 횡단하고 부분적 연결의 연쇄로서 파악할 수 있을까? 스트래선이 묘사하는 ‘멜라네시아적 사회성’은 한편에서는 은유와 환유를 통한 또 다른 현실이해에 의해 지지되고, 다른 한편에서는 서로 다른 역사적 단계에 구축된 인공물과 자연물의 상호작용의 맥락에 의해 지지된다. ‘구조인류학’의 제창자인 레비-스트로스가 평생을 걸쳐 보편성과 다양성의 공존을 모색한 것처럼, 스트래선 역시 인류학적 실천 속에서 인류의 지적ㆍ심적 능력의 보편성과 민족지적 기술에 나타나는 문화의 다원적인 양태를 조정하고자 한다. 『부분적인 연결』에서는 말하자면 ‘이질성을 통문화적으로 환원하지 않은 채 타자의 문화를 이해할 수 있는가’라는 1980년대 후반의 시대정신이 카오스이론과 프랙탈기하학이라는 복잡계 과학에 대한 관심과 함께 깊게 침투되어 있다. 스트래선은 그 후에도 출신지인 영국사회를 비롯한 서구사회의 인격, 소유, 젠더 등의 개념을 민족지에 기반하여 멜라네시아 사회의 다양한 현실구축의 기준과 예리하게 대치시키면서 부분으로도 전체로도 환원할 수 없는 무수한 절편으로서의 현실을 계속해서 가교한다.

스트래선을 위시한 연구자들은 흥미롭게도 데스콜라와 비베이로스 데 카스트로와는 별개의 계통에서 ‘자연과 문화의 대단절’을 넘어섰는데, 1990년대 이후가 되면 이러한 조류를 횡단하는 논의가 활성화되어 비교인류학의 르네상스라고도 말하는 상황이 국제적으로 펼쳐진다. 이 흐름은 2000년대 이후 ‘존재론적 전회’(ontological turn)라 불리는데, 그 배경에서 프랑스와 남미를 연결하는 긴밀한 인류학 성과의 축척이 영미와 멜라네시아를 연결하는 별도의 정보망과 대담하게 접속된다. (그리고 중요한 것은 양자를 오가는 인류학자도 소수이지만 존재한다는 점이다.) 이 흐름은 팀 잉골드(Tim Ingold, 1948~ 영국의 인류학자)를 중심으로 하는 ‘삶으로 향하는 인류학’의 연구조류를 수반하며, 상호 본질적인 논의를 교류하면서 인류학의 논의와 표현양식을 풍성화해왔다. 특히 21세기에 진행되는 일련의 논의에서 중요한 매개의 역할을 맡은 인류학자들 중에서 덴마크에 거점을 두고 있는 북유럽의 연구자들의 활약이 눈에 띤다.

21세기의 여명을 알리는 최근 20년간 인터넷서비스의 확장과 영어사용의 글로벌화를 수반한 인류학의 온라인저널이 활성화되고 있다. 이 시대는 에너지 문제와 지구온난화, 투기적인 경제로 인한 글로벌 금융위기 등 근대인의 존재를 뒤흔드는 리스크가 부상하는 시기이기도 하다. 이 속에서 인류학은 과학인류학의 비근대적 차원의 발견과 포스트모던 인류학의 ‘재귀성의 질문’을 지나 큰 전환을 맞이하고 있다. 그러나 이 전환은 결코 갑자기 생겨난 것이 아닐 뿐더러, 과거와 미래를 단절시키는 변화도 아니다. 라투르가 말한 것처럼, 인류학자 또한 끊임없이 반복되는 혁신을 통해 타자성과 생명의 연속성/비연송성을 질문하고 스스로의 전통에 귀속해가고 있다.

일찍이 헤나레(Amiria Henare), 홀브라드(Martin Holbraad), 와스텔(Sari Wastell) 등의 3인은 ‘존재론’을 둘러싼 질문이 인류학의 폐쇄성을 돌파하는 ‘조용한 혁명’을 일으키고 있다고 선언했다(『사물을 통해 사고하기』<Thinking Through Things: Theorizing Artefacts Ethnographically>(2007년). 그 후 ‘조용한 혁명’의 당사자인 비베이로스 드 카스트로 자신은 소음으로 넘쳐나는 논의에서 재빨리 빠져나가면서도, 문제의 중심에 있는 ‘존재론’이 동심원을 그리듯 타자성의 근원적인 질문으로 발전하고 있음을 강조한다. 여하간 인류학 연구 영역이 지난 20년간 크게 확장하여 ‘문화적 표상’에서 사상(事象)이 직조하는 현실의 깊은 곳까지, 인식론에서 존재론으로 키를 돌린 것은 확실하다. 이 변화는 문화를 모종의 해석 가능한 텍스트와 자연에서 독립한 의미론의 체계로서 사고하는 관습에서, 자연과 인공물과 인간신체를 하나의 가역적인 생성체의 네트워크(혹은 생명=사회적 실천의 편물)로 파악하는 큰 조류와 연결된다. 물론 일련의 ‘전회’의 배경을 보면, 비베이로스 데 카스트로와 라투르에게서는 베르그송, 베이트슨, 깁슨의 계승이, 라투르와 피에르 레비에게서는 미셸 세르의 철학의 계승이라는 복수의 철학적 계보의 착종이 있다. 나아가 후술할 콘에 의한 퍼스의 기호론의 급진적인 다시 읽기에서도 커뮤니케이션의 영역을 인간만이 아니라 비인간의 세계로 확장하는 인류학의 새로운 흐름의 특징이 나타난다. 

 

5. 복수의 전회와 ‘도래할 인류학’

‘존재론적 전회’ 이후의 인류학의 전개 속에서 특히 흥미로운 점은 에도아르도 콘의 ‘인간적인 것을 넘어서는 인류학’처럼, 자연계를 채우는 생물차원의 기호과정에까지 확장된 사고작용과, 그것을 전제로 성립하는 인간집단의 현실인식과의 관계에 대한 탐구이다. ‘인간 이상의 것’(more than human)을 파악하려는 새로운 인류학은 에콰도르 아마존에서의 숲과 동식물의 사고작용(에두아르도 콘, 『숲은 어떻게 생각하는가』, 2013)에서 글로벌자본주의에 의해 개조된 후 자연을 구축하는 송이버섯과 인간의 관계(A. 칭, 『세계 끝의 버섯』The Mushroom at the End of the World, 2015), '유정-의식을 가진 존재들(setient beings)'로서의 양식 연어에 대한 연구(M. E. 린, 『연어가 되다』Becoming Salmon, 2015)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영역을 다룬다. 나아가 생명과학자와 사회인류학의 협동을 모색하는 잉골드와 바르송의 『생명-사회적 생성』<Biological Becoming: Integrating biological and social anthropology>(2013년) 같은 흥미로운 시도와 상호작용하면서 ‘존재론의 인류학’과 함께 크게 주목받고 있다.

이러한 흐름 속에서 자연과 문화의 경계를 넘어서는 이종의 창발적인 만남을 탐구했던 도나 해러웨이의 영향을 받은 인류학자들은 인간이라는 종을 넘어서는 민족지적인 기술의 적용범주를 인간이라는 종 너머에까지 적용하는 ‘복수종의 민족지학’(multispecies ethnography)를 만들어내었다. 예를 들어, 에벤 커크시(Eben Kirksey)와 스테판 헬름라이크(Stefan Helmreich)는 ‘인류세(anthropocene)(※일본번역어는 “人新世”)에 문화를 쓴다’는 종-횡단적인 주제를 인류학에 제기할 뿐만 아니라 해러웨이와 상호 영향을 주고받는 오스트렐리아의 현대미술가 파트리시아 피체니니 등과 연대하여 『복수종의 살롱』<The Multispecies Salon>이라는 제목의 바이오아트 전람회를 2000년대부터 미국 각지에서 개최하여 그 성과를 2014년에 서적화했다. 이러한 이종협동의 실험적인 시도를 통해 인간이외의 생물종을 인류학에 가져오는 ‘종적전회’(種的轉回 species turn), 혹은 인간 이외의 동물을 정치적, 윤리적인 타자로 간주하는 ‘동물적 전회(animal turn)’라고 불리는 복수의 ‘전회’가 포스트인문과학의 주변에서 생겨나고 있다.

보다 넓은 의미에서 사물과 인간의 관계를 둘러싼 인류학 연구에 눈을 돌리면, 행위주체성이라는 관점에서 미술작품과 인공물 사이를 연결하는 상호작용론을 쇄신한  젤의 『예술과 에이전시』<Art and Agency: An Anthropological Theory>(1998년)를 필두로, 바르부르크를 계승해 문자전승에 구애되지 않는 이미지의 계승술을 ‘기억의 인류학’으로 파악하는 카를로 세베리(Carlo Severi)의 연구가 있고, 그와 마찬가지로 미술사ㆍ인류학ㆍ표상이론의 제 연구를 연결하는 조르주 디디-위베르망(George Didi-Huberman), 한스 베르팅거(Hans Wertinger)의 『이미지 인류학』 등이 있다. 이들의 연구는 시각예술과의 관련영역에서 큰 성과를 올리고 있다. 또 잉골드의 ‘그래픽인류학’, 오토와 간을 위시한 덴마크 인류학자들의 ‘디자인 인류학’, 나카자와 신이치의 『예술인류학』 등 예술과 인류학의 실천이 근접하고 있다. 과학인류학에 가까운 관심영역에서는 캐스퍼 브루노 옌센(Casper Bruun Jensen)과 모리타 아츠로우(森田敦郎)의 사회적인 인프라스트럭쳐의 존재론적 연구, 네델란드의 대학병원에서 이뤄지는 진단과 치료의 상호행위의 ‘실천적 존재론’의 가능성을 보여준 아네마리 몰(Annemarie Mol)의 연구(『다(多)로서의 신체』<The Body Multiple: Ontology in Method Practice>(2003년))가 있다.

인류학에서 ‘존재론적 전회’를 말하기 위해서는 북유럽과 남미와 더불어 일본을 빼놓을 수 없다. 현대 일본은 송이버섯의 생산과 소비를 둘러싼 글로벌한 네트워크와 ‘자본주의 이후의 자연’을 탐구하는 안나 칭, 근대문명에 의해 해로운 짐승으로 간주된 야생동물의 민속생태학적 문헌을 탐구하는 존 나이트 등의 인류학자들에게 중요한 필드로 자리한다. 또 라투르와 스트라샌 이후의 현대인류학의 동향은 일본에서는 카스가 나오키(春日直樹), 이시이 미호(石井美保), 모리타 아츠로우(森田敦郎), 오오무라 케이이치(大村敬一) 등의 인류학자들을 통해 적극적으로 소개되었고, 또 반대로 그들의 논고는 일본 인류학의 성과로서 해외에 소개되고 있다. 2012년에는 국제적인 인류학 잡지인 『HAU』에 카스가 나오키를 비롯한 일본의 인류학자들을 소개하는 「일본의 존재론적 전회」<Anthropology as critique of reality: A Japanese turn>의 특집이 꾸며져 주목을 받은 바 있다. 이러한 동향 속에서 오쿠노 카츠미(奥野克己) 등이 서술한 다섯 권의 <올 수밖에 없는 인류학> 시리즈(2009년~2013년)는 인근학문의 연구자들과 함께 ‘인류학의 재구축’의 기치를 내걸었다. 또 스가와라 카즈코(菅原和子)(『狩り狩られる経験の現象学: ブッシュマンの感応と変身』[잡고 잡히는 경험의 현상학: 부시맨의 감응과 변신], 2015년), 야마구치 아키라(山口顯)(『レヴィ=ストロース まなざしの構造人類学』[레비-스트로스 시선의 구조주의], 2012년)와 같이, 현상학과 구조주의의 내부에서 ‘존재론적 전회’의 이론적 전제를 재검토하고 이것을 비판적으로 넘어서고자 하는 제 연구가 나타나고 있다.

협의의 문화인류학의 아카데미즘에서 조금 떨어진 곳에는 1990년대부터 라투르, 세르, 데스콜라와 학술적인 교류를 이어온 나카자와 신이치가 있다. 그는 레비-스트로스가 일찍이 ‘야생의 사고’라고 한 마음의 메카니즘을 다원적으로 파고들었고, 이제 새로운 인류학에 응답하는 몇가지 작업을 남겨두고 있다. 이를테면 그는 스트래선과 거의 동시기에 프랙탈기하학과 스케일링의 문제을 인류학의 이론적 차원에 도입했고(『설편곡선론』, 1985), 미나카타 구마구스의 사상에서 인간과 자연의 분단을 넘어서는 새로운 가능성을 발견해내었으며(『숲의 바로크』, 1992), 일본철학에서 레비-스트로스, 들뢰즈, 라투르를 통해 비근대적인 가능성을 찾아내는 등(『필로소피카 야포니카』, 2001) 1980년대부터 현재에 이르기까지 현대인류학의 주요한 관심에 호응하는 다양한 사상을 논해왔다. 그는 『대칭성인류학』(2004년)을 이론적인 중핵으로 전개된 ‘카이에 소바주’ 시리즈(전5권)에서는, 정신과 의사 이그나시오 블랑코가 주장한 ‘대칭성 이론’에 의한 ‘복논리’(bi-logic)의 구조로서 인류의 마음의 보편성을 탐구하고, 신화학, 고고학, 정신분석학, 예술이론, 자연철학, 인지과학 등을 총합하여 ‘도래할 인류학’의 궤적을 그려내었다.

‘존재론적 전회’는 이론적 유행의 하나로 소비될 것인가, 아니면 본질적인 전환의 계기로서 수용될 것인가? 혹은 철학과 인류학의 경계에서 고전적인 문제를 해명하는 중요한 활로를 찾아낼 것인가? 현대인류학자는 어떻게든 자신의 입장을 스스로 선택해야 할 시기에 직면해있다. 표면적으로는 큰 혁신으로 다가오는 이 조류는 어쩌면 인간상의 변신에 수반하는 ‘인간이상의 인류학’을 실현가능케 하는 과도적 상황에 불과한 것일는지 모른다. 그러나 변화에 직면하여 ‘조용한 태동’이 계속된다면, 인류학은 신시대를 위한 지(知)의 플랫폼을 구축하고 진보해야 한다. 이를 위해 인류학은 논의를 심화하고 예상조차 할 수 없는 타성(他性)을 발견하며 타 분야와 연대하는 인문학 영역의 재편성을 필요로 한다. 이 조류는 더 큰 필드로 확장되어 복수의 실천과 실험에 접속되어야 한다. 올 수 밖에 없는 이종생성의 인류학은 그곳에서 도래할 것이다.

 

 

石倉敏明「今日の人類学地図:レヴィ=ストロースから「存在論の人類学」まで」『現代思想』2016年3月臨時増刊号。

 

※'존재론적 전회'의 정치학에 관해서는 다음 블로그의 번역글을 참조할 수 있다.

 http://minamjah.tistory.com/107

Posted by Sarantoy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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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를 쓴다는 행위 그 논리와 윤리

노에 케이이치(野家啓一)

   

지금, 내 안에는 죽은 자와 산자의 구별이 없다. 죽은 자와 산자가 뒤섞여 내 마음을 휘젓는다츠루미 슌스케(鶴見俊輔)

 

  1. 문제 상황

  사람이 밥만으로 살 수 없듯이 현재만으로 살아갈 수 없다. 때로는 과거의 추억에 몸을 맡기고 때로는 미래에 대한 기대로 마음을 설레면서 인간은 현재라는 순간을 살아간다. 지금 손에 쥐고 있는 만년필을 보아도, 오랜 세월의 영광과 함께 그 세월의 흔적과 때가 묻은 이 만년필이야말로 돌아올 새해 연하장을 예비한다. 이처럼 현재라는 시점에는 과거와 미래가 몇 겹씩 중첩되어 있다. 여기에는 흘러간 물리학적 시간뿐만 아니라 기억과 상상에 의해 쌓아올려진 지질학적 시간도 담겨있다.

  그런데 과거와 미래는 비대칭적이다. 미래에 대한 기대는 덧없이 사라지지만, 과거의 내역은 사라지지 않는다. 지나간 세월에 대한 기억이야말로 현재 자신의 아이덴티티를 형성하는 불가결한 일부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역사기술은 개인과 공동체, 국가의 아이덴티티, 자기란 타자인가라는 물음과 밀접하게 관련되어 있다. 물론 아이덴티티의 주장은 내셔널리즘의 문제 권역과 맞닿아있으며, 그 이면에 배제와 억압과 차별이라는 네거티브의 측면을 포함하지 않을 수 없다. 이러한 의미에서 역사기술은 아이덴티티 폴리틱스와 밀접하게 관련되어 있으며 정치성을 띤다는 것은 말할 것도 없다. 자기의 존재증명과 그 부정을 둘러싸고 제기된 역사수정주의논쟁을 비롯한 몇몇 논쟁도 그 연장선상에 있다.

  청년기의 아이덴티티에 대해 예리한 고찰을 행한 E. H. 에릭슨은 아이덴티티를 자기의 일관성연속성, 그리고 타자에 의한 자기의 공유승인이라는 양 측면으로 정의한다. 이것은 역사기술에서도 마찬가지이다. 일관성과 연속성을 결여한 역사기술은 논리적으로 파탄날 수밖에 없으며, 타자에 의한 공유승인을 결여한 역사기술은 윤리적 정당성을 갖지 못한 거만한 자[夜郎自大]의 독백으로 화할 뿐이다. 그러므로 역사기술은 논리적 정합성만으로, 또 윤리적 정당성만으로 성립하지 않는다. 그것은 논리와 윤리라는 두 초점의 타원형의 서사’[物語]이. (역사기술의 논리적 측면에 대해, 무엇보다 인과성법칙성에 대해서는 본권의 이세다 테츠지(伊勢田哲治)의 논문을 참고하시오.)

  지금 서사’[物語](narrative)라고 한 것은 다름 아닌, 역사는 말에 의해 전승되며 남겨진 기록이라는 단순한 사실을 확인해놓고자 한 때문이다. 문자가 없는 곳에서는 구전에 의한 역사가 성립할 수 있지만, 말이 없는 곳에서 역사는 존재할 수 없다. 하이데거는 일찍이 돌덩이는 세계상실적(weltlos)이며, 동물은 세계궁핍적(weltarm)이며, 인간은 세계형성적(weltbildend)이다라는 테제를 제출한 바 있다. 이를 인용하면, 동물은 말을 갖지 않는 고로 역사궁핍적인 것에 비해, 로고스를 가진 동물로서의 인간만이 역사형성적이다. 그리고 역사는 언어로 말해진다는 자명한 사실이야말로 20세기의 역사학과 역사철학이 직면해야 했던 아포리아이다. 언어론적 전회이다. (이것이 역사학에 주었던 임팩트와 그 귀결에 대해서는 본권의 오다나카 나오키(小田中直樹) 논문을 참조하시오.)

  그런데 역사가 언어로 쓰인다 해도 역사기술이 모든 사건을 말할 수는 없고 쓸 수도 없다. 그것은 신이 아니면 불가능하다. 따라서 역사가들은 자신의 이해관심과 동기에 따라 말하고 싶은 말할 만큼 가치 있는 것’, 즉 그 시대의 의미가치있는 사건을 선택해내는 것이다. 그것을 결정하는 것은 역사가의 시점내지는 퍼스펙티브이며, 이 속에는 이미 일종의 가치판단이 작동하고 있다. 바꿔 말하면, 그의 퍼스펙티브에 포착되지 않은 사건은 망각되어 역사의 지층에 침몰될 수밖에 없다. 그러한 의미에서 현재화(顯在化)된 역사기술의 배후에서는 망각된 사건들이 신음소리 내지는 침묵을 강요받는 죽은 자들의 외침이 이야기를 갈구하는 것이다.

  그렇게 목소리가 되지 못한 목소리를 듣기 위해서는 앉아서 귀를 기울이는 것만으로는 부족하다. 묻힌 사료를 발굴하여 실증하고, 죽은 자의 목소리를 레토릭으로 재현하는 말하는 손의 능동적 관여가 필요하다. 기술(記述)이 만들어내는 역사가 역사가의 시점과 퍼스펙티브에 의해 선택된 것이라면, 망각되고 은폐된 목소리를 현재화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시좌의 전환이 요구된다. 20세기 후반의 역사학에서 그러한 시좌의 전화을 가져온 것은 오리엔탈리즘 비판, 젠더사, 포스트 콜로니얼리즘 이라는 새로운 개념장치의 도입이었다. 그것들을 통해 이제까지 공적인 역사에의 등장을 거부당한 마이너리티에 속한 사람들의 침묵에 말을 돌려주었던 것이다. (상세한 것은 본권의 모리 아키코(森明子)의 논문을 참조하시오.) 그리고 시좌의 전환은 동시에 역사적 사실에 대한 윤리적 태도의 변경을 부가한다.

 

  2. 언어론적 전회의 귀추

  앞서 서술한 것과 같이, 역사학이 역사는 언어로 말한다는 간명한 사실을 다시금 자각해야 하는 것은 언어론적 전회라 불리는 사건 때문이다. 다만 언어론적 전회에서 20세기 초두 철학의 영역에서 일어난 그것과 1980년대 이후 역사학과 인류학의 영역에서 일어난 그것을 구별해야 한다. 언어론에서 말하자면, 전자의 기반이 된 것은 G. 프레게(Gottlob Frege, 1848~1925)B. 러셀에 의해 체계화된 기호논리학이며, 후자의 기반은 F. 소쉬르에 연원하는 포스트구조주의의 언어이론이다.

  본래 언어론적 전회’(the linguistic turn)G. 베르그만이 만든 용어이며R. 로티가 자신이 편찬한 분석철학의 선집(anthology)의 제목으로 붙인 이후 인구에 회자된 개념이다. 그 장대한 서문에서 로티는 언어철학자들의 공통의 지향을 언어를 개량함으로써 혹은 현재 우리가 쓰고 있는 언어를 보다 잘 이해함으로써 철학적 문제를 해결(혹은 해소)하고자 하는 견해로 요약한다. 데카르트 이후의 근대철학이 의식과 세계의 관계를 내성적 방법에 의해 해명하고자 한 것이었음에 비해, 현대의 철학은 언어와 세계의 관계를 언어분석적 방법에 의해 해명하는 것을 목표로 한다는 것이다.

  이 방향전환은 모든 철학은 <언어비판>이다라는 비트겐슈타인의 언명에 의해 단적으로 표명된다. 그런데 여기에는 명제와 사태, 말과 사물[대상] 간의 지시 관계가 자명한 전제로서 의심되지 않는다. 이른바 언어와 세계란 예정조화적인 대응관계(寫像關係)에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프레게와 러셀을 포함해서 제1의 언어론적 전회를 이끌었던 철학자들은 기본적으로 언어를 현재를 지시하는 투명한 매체로서 다루는 실재론적 언어관을 견지했다고 할 수 있다.

  그에 비해, 2의 언어론적 전회에서는 언어와 실재의 관계가 현저하게 불투명한 것이다. 소쉬르 이후의 언어학자에 따르면, 언어는 실체적인 지시 관계를 갖지 않는 차이의 시스템에 다름 아니다. 즉 언어의 본질은 언어가 세계의 존재 그대로 묘사하는 것이 아니라 세계를 의미적으로 구성함으로써 존재한다는 데에 있다. 이 래디컬한 귀결로서 포스트구조주의가 발흥했고, J. 데리다는 텍스트와 컨텍스트의 경계를 유동화하고 텍스트에 외부는 없다고 단언했으며, R. 바르트는 의미작용에 있어서 작가의 특권성을 부인하는 작가의 죽음을 선고했다.

  이와 같은 포스트구조주의의 조류를 배경으로 하는 언어론적 전회의 경향은 역사기술의 방법론에도 심대한 영향을 끼치지 않을 수 없었다. 사료비판과 실증적 절차에 기반한 과거의 사건과 객관적 복원이라는 L. 랑케 이후의 근대역사학의 근본전제에 의심의 눈초리를 보내기 시작한 것이다. 언어로 기술된 사료가 다양한 해석에 열려 있는 텍스트에 불과하여, 그 외부에 있는 역사적 현실 간에 일의적(一義的)인 지시 관계를 갖지 못한다면, 과거의 복원이라는 역사가의 작업은 불가능할 수밖에 없다. 따라서 언어론적 전회는 역사적 사실과 픽션 사이에 견인되어야 하는 명확한 경계선을 애매하게 만들고 역사학의 목표를 사실의 탐구로부터 의미표상의 탐구로 전환시킨다. 이것이 역사학의 위기가 아니면 무엇이겠는가. 중세역사가인 가브리엘 슈피겔(Gabrielle Spiegel)은 이를 역사를 해체하는 움직임으로 받아들이면서 역사역사주의중세 텍스트의 사회이론이라는 논문에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과거를 이성에 의해 객관적으로조사한다면 역사의 텍스트의 진정한 의미를 회복할 수 있다는, 흔들림 없는 인간중심주의의 확신은 포스트모더니즘의 비평논쟁에서 통렬한 공격을 받아왔다. [중략] 역사가의 입장에서 현재의 비평의 진행과정을 바라보면서 받은 인상은 역사를 해체하는 움직임, 현실과 유리되어 언어로 돌진하는, 언어야말로 인간의 의식을 구성하는 주체이며 사회적인 의미를 만들어내는 것이라고 파악하는 추세이다. "

  이 문제제기를 받아들여 로렌스 스톤은 과거와 현재(Past & Present)지에 역사학과 포스트모던이라는 제목의 소논문을 기고하면서, ‘역사학자는 역사학이란 무엇을 하는 것이며 어떻게 그것을 이끌어가야 하는가에 대해 자신감을 잃을 위기에 직면했다고 호소했다. 그에 따르면, 작금의 위기의 진원은 소쉬르로 시작해서 데리다에 이르는 언어학, 상징인류학의 영향, 거기에 뉴히스토리즘의 세 조류에 다름 아니다. 그리고 우리 역사가가 이 피난처 없는 올가미에서 탈출하여 살아갈 길을 보여주고 있다며 앞서 슈피겔의 논문을 추천했다. 이를 계기로 과거와 현재(Past & Present)지에는 포스트모던의 영향을 둘러싼 활발한 논쟁이 전개되었다.

  스톤은 언급하지 않았지만, 역사학에서 또 하나의 위기의 연원으로서 잊어서 안되는 것이 있다. 그것은 헤이튼 호와이트에 의한 역사의 시학의 제창이다. 호와이트는 메타히스토리(1973)에서 19세기의 대표적인 역사서를 참조하면서 역사적 상상력의 심층구조에 대한 분석을 시도했다. 그에 따르면, 역사기술이란 서사적인 산문적 언설의 형태를 취하는 언어구조체이며, 메타포(은유)와 메토니미(환유) 등의 비유표현을 채용하여 플롯의 구성을 행하는 시적행위에 다름 아니다.

  즉 역사기술에는 수사적 요소가 불가결하며, 대립하는 해석전략의 경합 속에서 역사에 관해 동일한 하나의 퍼스펙티브를 취사선택하는 최선의 기반은 인식론적인 것이라기보다 오히려 궁극적으로는 미학적 혹은 도덕적인 것이라고 주장했다.

  이러한 호와이트의 논의에 대해서는 아우슈비츠와 표상의 한계에 대한 심포지엄에서 카를로 긴스부르그가 강한 비판을 제기했다. 그러나 역사의 시학에 의한 문제제기의 의미가 상실된 것은 아니다. 역사기술이 이윽고 소박한 실증주의와 경험주의의 지점에서 후퇴할 수밖에 없는 것은 분명하며, 그것[역사기술]이 상상력과 레토릭이 관여하는 언어행위인 것은 이미 공통적인 이해사항이었기 때문이다. 이 의미에서 언어론적 전회와 역사의 시학의 세례를 통해 역사학은 인류학과 함께 자기의 학문적 기반을 비판적으로 성찰하는 재귀적 자기반성의 학문으로서 스스로를 단련해나간다고 할 수 있다.

 

  3. 크로노스와 카이로스 

  역사는 모든 것을 말할 수 없으며 말하기에 가치 있는 것만을 선택해서 서술하는 작업이라고 한다면, 그 선택과 결단을 지탱하는 것은 역사가의 시좌임을 빼놓을 수 없다. 그 시좌가 광범위한 사료 속에서 특정의 사건을 취사선택하여 그것들을 적절하게 배치해서 서술하게 한다. 그런데 사료 그 자체의 존재가 우발성과 자의성을 낳는다는 것에 대해 미세 토시유키(三瀬利之)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어떤 사건의 기억과 사실이 기록자의 취사선택과 쓰인 것자체의 가공과 구조화를 거쳐 문서로서 기록된다고 해도 그것이 그대로 역사가의 사료가 되는 것은 아니다. 그것이 사료가 되기 위해서는 그 문서가 물리적으로 잔존하여 역사가에게 입수되어야 한다. 그리고 쓰인 것에도 선별이 있는 것처럼 잔존하는 것’ ‘입수하는 것에도 마찬가지로 선별이 있다."

  즉 역사화의 시좌가 스크리닝을 행하기 이전에 사료의 존재 그 자체가 스크리닝의 결과인 것이다. 여기에는 이중의 선별의 기제가 작동된다. 덧붙여 말하면, 역사가의 사좌가 시대정신과 이해관심에 의해 채색되어 어떤 종류의 이데올로기성을 띠는 것임은 말할 것도 없다. 그렇기 때문에 역사를 기술하는 주체의 선 위치’(포지셔널리티)가 문제가 되는 것이다.

  역사가는 과학자가 샬레 속에서 임의의 체험을 핀센트로 집어내는 것처럼, 역사적 사건을 사료 속에서 무작위로 샘플링하는 것이 아니다. 그 선택에는 이른바 역사가의 학문적 실존이 달려있다. 당연하게도 특정의 시좌에 의해 열려진 역사의 시공(時空)은 동방향 동질이 아니라 관심의 원근법에 따라 왜곡될 수밖에 없다. 그것은 상기된 시공이 퍼스펙티브성을 가지고 어떤 장면은 선명히 클로즈업하고 관계없는 사상(事象)은 새벽녘의 회색안개 속으로 사라지게 한다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기술(記述)에 의해 현전(現前)하는 역사적 공간은 비-유클리트적이다. 역사적 시간을 지배하는 것은 크로노스(연속적수량적 시간)가 아니라 카이로스(好機, 適時)라고 말할 수도 있다. 여기서 카이로스란 W. 벤야민이 역사철학테제 에서 말했던 다음과 같은 순간을 말한다.

"지나가버린 사태를 역사적인 것으로 명확히 언표한다는 것은 그것을 <실제로 있었던 대로> 인식하는 것이 아니라 위기의 순간에 잠시 열린 기억[想起]을 다루는 것이라 할 수 있다. 역사적 유물론에서는 위기의 순간에 역사적 주체에게 예기치 않게 나타나는, 그와 같은 과거의 이미지를 확보하는 것이 중요하다."

  그러나 위기의 순간에 열린 과거의 이미지는 지속되지 않는다. 벤야민이 말한 것과 같이, ‘과거의 진정한 이미지는 반드시 스쳐지나간다. 과거는 그것이 인식 가능한 찰나의 일순간을 열어두고, 두 번 다시는 나타나지 않는다는 것이다. 카이로스가 과거로부터 미래로 향하여 엿처럼 늘어진연속적 시간이 아니라 호기(好機)로서 나타나는 이산적(離散的) 시간인 이상 그것은 당연하다. 그렇기 때문에 역사가는 그 순간을 기억에 머물게 하고 다른 사건과 연결하여 형상화하기 위해 서사’(narrative)를 직조해내는 것이다. 이러한 의미에서 서사란 카이로스의 도래에 의해 왜곡된 시공간에 못을 박고 고리를 걸고 자일을 걸쳐 나아가는 역사가의 암벽등반의 궤적에 다름 아니다.

  그런데 서사가 특정한 시좌에서 행하는 언어행위인 이상, 거기에는 망각과 억압과 은폐가 발생할 수밖에 없으며, ‘서사로부터 배제된 사건들이 침묵의 함성을 지르고 이의를 신청할 것임은 분명하다. 그것을 역사의 외부라 부르자. 역사의 외부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고 그것을 현재화(顯在化)하기 위해 필요한 것은 무엇보다도 시좌의 전환이다. 그와 같이 시좌의 전환이 자각된 사례가 20세기 후반의 역사학과 만난 것이다. 그것은 바로 오리엔탈리즘젠더이다.

  

  4. 시좌의 전환

  오리엔탈리즘이란 동양(오리엔트)에 대한 서양(옥시덴트)사고 및 표상의 양식이며, 그와 동시에 그것이 서양의 동양에 대한 정치적문화적 지배의 양식이었다는 것을 밝히는 개념이다. 오리엔탈리즘을 제기한 E. 사이드 자신의 정의에 따르면, ‘오리엔탈리즘이란 오리엔트를 지배하고 재구성하여 위압하기 위한 서양의 양식이다. 그리고 그는 오리엔탈리즘 속에 나타나는 오리엔트는 서양의 학문, 서양인의 의식, 나아가 시대가 내려오면서 서양의 제국지배영역 속으로 오리엔트를 억지로 끌어들이는 일련의 힘의 조합의 총체에 의해 틀지어지는 표상의 체계이다라고 말한다. 그것을 사이드는 심상지리라고 부른다.

  이와 같은 사이드의 문제제기는 이른바 양의도형을 보는 것처럼 역사를 보는 시각차를 반영한다. 그에 의해 이제까지 억압되고 은폐된, 일정한 패턴을 강요받은 오리엔트의 이미지가 일신됨과 더불어 거기에 들러붙은 정치적문화적 헤게모니의 역학이 만천하에 드러나게 된 것이다. 시좌의 전환은 서양 대 동양이라는 뿌리 깊고 진부한 이항대립을 무효화하고 파산시켰다고 해도 무방하다. 그리고 오리엔탈리즘 비판은 단지 서양과 동양의 관계에 머물지 않고 일반적으로 타자를 표상할 때의 <>의 존재방식과 배치에 심각한 반성을 요구한다.

  남성과 여성이라는 자명한 구별 또한 자연계의 사실 보다는 인위적인 사실이라는 것을 부각한 것이 젠더라는 개념이다. 젠더는 본래 문법상의 성별을 가리키는 언어학 용어였지만, 1970년대 제2차 페미니즘 운동 속에서 생물학적 성차를 가리키는 섹스에 대해 사회적문화적으로 형성되는 성차를 표현하는 개념으로서 사용되기 시작했다. 젠더 개념을 역사학에 도입했던 존 스콧에 의하면 젠더란 생물학적 성을 가진 신체 속에 강요된 사회적 범주에 다름 아니며 육체적 차이에 의미를 부여하는 지()’이다. 그래서 그녀는 포스트구조주의의 문학이론의 텍스트의미의 관계에 주의를 기울이면서, 젠더 개념이 역사학에 주었던 임팩트에 관해 다음과 같이 말했다.

"그러나 역사 속에 젠더를 발견하기 위해서는 역사학 분야의 전형적인 테마를 다시금 읽어 내는 것만으로는 부족하다. 상이한 종류의 해석이 요구되는 것이다. [중략] 이 관점에 따르면, 긍정적인 정의란 언제나 그 대립물을 부정 혹은 억압하는 속에서 성립한다. 그리고 범주 간의 대립은 어떤 범주의 내부에 존재하는 애매함을 억압한다. 어떠한 통일된 개념도 억압 내지는 부정의 요소를 포함하고, 그 속에서 성립되는 고로 불안정하며 하나로 정리되지 않는다. [중략] 의미를 둘러싼 항쟁은 새로운 대립의 도입과 위계의 역전, 억압된 용어를 양지로 끌고나와 이분된 것처럼 보이는 것의 자연스러운 지위에 도전하며, 그것들의 상호의존성과 각각의 내부의 불안정성을 밝히고자 시도한다."

  조금 추상적으로 말하면, 젠더 개념이 요구하는 것은 남성/여성과 같은 자명한 이항대립 속에 잠재된 억압적 요소를 폭로하고 기존의 범주의 안정성을 흔드는 것이다. 이것은 앞서 이제까지 서술한 시좌의 전환의 요구에 다름 아니다. 그러나 그것은 정치사, 경제사, 사회사라는 기존의 제 분야에 여성사젠더사라는 새로운 영역을 추가하는 것이 아니다. 역사학에 젠더의 시점을 도입하는 것은 그 영역을 보편적으로 젠더화하는 것이다. 따라서 우에노 치즈코의 젠더사는 정사(正史)에 대해 여성이라는 간과해온 영역’(missing perspective)을 부가함으로써 정사의 진리성을 높이는 것에 공헌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편향을 인정함으로써 전방위적으로 정사를 참칭하는 것에 대해 너는 단지 남성사에 불과하다고 선언하는 것이다라는 지적은 정곡을 지르는 것이라 말할 수 있다. 그 의미에서 인종, 민족, 계급, 인종이라는 개념도 역시 젠더의 관점에서 재구성되어야 한다.  

  ‘오리엔탈리즘젠더의 개념에 의해 일어난 시좌의 전환은 이제까지의 역사기술에서 망각되고 은폐되어 왔던 마이너리티의 목소리를 발굴하여 현재화한다. 우리나라의 역사수정주의 논쟁 속에서 기존에 필요악으로 간주해왔던 <종군위안부>의 존재가 다시금 전쟁에서의 성폭력의 문제로 제기된 것도 그러한 시좌의 전환의 일례이다. 그리고 당연하게도 시좌의 전환은 역사의 다시쓰기를 요구한다. 그리하여 역사기술이란 마스터 내러티브(지배적 서사)에 대한 끊임없는 수정의 운동이라고 말해도 좋다. 그것은 한편으로는 역사가 미래의 재심에 열려있다는 증좌이기도 하다.

  

  5. 역사의 세대 간 윤리

  이미 인구에 회자되어 온 바, T. 아도르노의 아우슈비츠 이후 시를 쓰는 것은 야만이다라는 말은 지금에 이르러 20세기를 흔든 정문일침[頂門一針]으로 계속된다. 게다가 그가 다른 곳에서 아우슈비츠 이후 우리의 생존이 긍정적인 것이라는 어떠한 주장도 단순한 진술에 불과하며 그러한 주장은 희생자들의 행위가 부당한 것인가라는 저항감을 불러일으킨다고 서술한 것을 보면, 앞서의 말에서 시를 쓰는 것이라는 표현보다 역사를 쓰는 것이 보다 적절한 표현이리라. 역사를 쓰는 자는 그 기술이 과거의 죽은 자에 대한 부당한 행위인가 아닌가 라는 끊임없는 회의와 망설임에 시달리기 때문이다.

  이미 서술한 것처럼, 역사가는 말하기에 가치 있는 것의 선별을 행한다. 따라서 쓰인 것의 배후에는 선별에 누락된 쓰이지 않은이름 없는 죽은 자들의 행위와 사적이 산을 이루며 북적거리고 있다. 물론 그/그녀들이 존재하지 않을 리 없다. 그 흔적은 지금도 남아있다. 오오하시 료우스케(大橋良介)의 말을 빌리면, “가령 죽은 자가 무명인 채로 잊혀 진다 해도, 그들은 현재 세계의 발밑에서 침묵하는 과거 세계를보통의 말로 하면 전통형성한 자로서 무명인 채로 현재적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그 흔적을 찾아내어 서사화하는것은 역사가의 책무라고 말할 수 있다. 즉 역사적 사실의 선별이 [역사가의] 현재적 관심에 기초하여 행해지는 것은 당연하다 해도, 그 선별의 정당성(‘부당한 행위인가 아닌가)은 죽은 자의 시선에 의해 뒷받침될 수밖에 없다.

  이것을 그 반대의 의미로 세대 간 윤리라고 부를 수 있다. 통상의 세대 간 윤리는 미래세대에 대한 책임의 관점에서 논해지기 때문이다. 물론 죽은 자의 목소리는 사료를 통해 해석을 거치지 않으면 들리지 않는다. 여기서 울림을 만들어내는 것은 다양한 해석을 만들어내는 다성성이다. 그로부터 이해가능성과 수용가능성을 가진 어떠한 서사가 직조되는가는 역사가의 기량과 판단에 달려있다. 만약 거기서 무언가의 통제적 이념이 움직인다고 한다면, 그것은 이름 없는 죽은 자들을 정당하게 대우하는 과거로 향하는 세대 간 윤리일 것이다.

  그와 동시에 역사기술은 현재 세대 혹은 미래 세대를 향해 기억하시오!”라는 말을 거는 언어행위이기도 하다. 기억에 가치 있는 것을 선택해내고 이야기하는 행위는 죽은 자의 시선과 함께 현재 및 미래의 타자의 시선으로 뒷받침되어야 한다. 거기에는 본래의 의미에서의 세대 간 윤리가 존재한다. 그리하여 역사기술에 윤리를 말할 여지가 있다면, 그것은 과거와 미래의 쌍방향으로 향하는 세대 간 윤리라는 장소일 것이다. 역사란 현재와 과거 사이를 채우는 알 수 없는 대화라는 E. H. 카의 유명한 정의를 빌면, 역사를 쓴다는 행위는 산자와 죽은 자 사이를 그리고 미생한 자들과의 사이를 채우는 알 수 없는 대화인 것이다 

 

野家啓一2009、「歴史くという行為」、『歴史物語哲学』、岩波書店

 

Posted by Sarantoy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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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마노우치 야스시의 총력전체제』(筑摩書房, 2015)에 실린 나리타 류우이치의 해제를 번역했다. 야마노우치의 총력전체제론은 다음의 글에서와 같이, 전전-전후를 단절보다는 연속의 관점에서 파악한다. 즉 전시기의 총력전체제가 전후일본의 사회시스템의 기초를 다졌다는 주장이다. 전전-전후를 단절의 관점에서 파악한 '시민사회파'의 주류 속에서 야마노우치의 총력전체제론은 일본 바깥의 일본연구자에게 더욱 영향을 끼쳤고, 그들에게 다양한 각도에서 전전-전후를 접근할 수 있는 인식의 틀을 제공해왔다. 

야마노우치의 『총력전체제』는 1980년대 후반 이후 총력전체제론에 관한 그의 논문을 모아놓은 것이다. 최근 다양한 관점의 '전후일본론'이 제출되는 가운데, 이 책의 내용은 조금 시의성이 떨어진다는 느낌이다. 다만 일찍이 전전-전후의 일본의 연속성에 착목한 논의라는 데에 의의가 있는 것 같다. 다음의 해제는 일본 바깥에서 현대일본에 대한 연구사를 개괄해보는데 도움을 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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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마노우치 야스시(山之内靖)와 ‘총력전체제’론에 관하여

나리타 류우이치(成田龍一)

 

0.

야마노우치 야스시가 총력전체제론을 구상하기 시작한 것은 시대의 대전환기인 1980년대 후반이다. 그 직접적 계기는 일본의 사회과학이 이때의 시대적 전환을 다룰만한 구상을 구축할 수 없음에 대한 초조함이었을는지 모른다.

 

1.

야마노우치는 전후 일본의 사회과학을 대표하는 오오츠카 히사오(大塚久雄)의 문하생이었으며 경제사 연구자로 출발하여 전 생애에 걸쳐 사회과학 전반으로 관심영역을 넓혀갔다. 1960년 안보투쟁 때에는 대학원 생활을 보냈고, 1970년대 전반기에는 교원으로서 학생운동과 교류하며 역사적인 전환을 자신의 학문에 어떻게 담아낼 것인가 라는 과제와 격투를 벌였다.

야마노우치는 1960년대 냉전체제의 한가운데에서 역사적 분석과 시대상황에 대한 고찰을 왕복하며 일본과 세계의 폭넓은 사례에 지속적인 관심을 보여 왔다. 일찍이 그는 사회과학이나 사상의 새로운 흐름에 대처하면서 시대비판적인 새로운 이론을 구축함과 동시에 시대의 변화에 조응하여 연구대상을 새롭게 설정하는 등 끊임없이 새로운 이론적 틀을 모색했다.

야마노우치는 각 년대의 무대마다 정면승부의 논의를 전개해왔다. 그 일환으로 야마노우치가 번역에 관여한 것을 개관하는 것만으로도 그의 논의가 얼마나 다방면에 걸쳐 있었는지를 짐작할 수 있다.

1987년 로날드 필립 도어(Ronald Philip Dore)의 『영국의 공장ㆍ일본의 공장—노사관계의 비교사회학』, 1993년 M. J. 피오리와 C. F. 세블의 『제2산업분수령』, 1997년 메리치의 『현대를 사는 유목민—새로운 공공 공간의 창출을 향하여』, 2006년 데랑티(Gerard Delanty)의 『커뮤니티—글로벌화와 사회이론의 변용』, 2003년 R. 코엔과 P. 케네디의 『글로벌 소시얼러지』 등 그의 관심은 사방에 뻗어있다.

그러나 이러한 번역물들은 일본의 사회과학이 직면한 과제에 몰두한 결과이며, 야마노우치 자신의 저작과 겹쳐보면 전후 일본의 사회과학이 걸어온 궤적을 알 수 있다. 일본인 학자 중에서도 야마노우치는 스스로 도달한 이론에 안주하지 않고 그 깊이를 더해 끊임없이 새로운 과제를 제출하고 시대에 대한 비판적 연구의 틀을 만들어낸 학자의 한 전형을 보여준다.

본서에 실린 총력전체제의 고찰은 그가 태어나서 자란 총력전 시기의 기억과 경험 그리고 이제까지 그의 연구의 연장선상에서 필연적으로 제기된 테마로서, 그가 50대부터 시작한 프로젝트에서 산출된 결과이다.

 

2.

우선 야마노우치 야스시에게 1980년대 후반이 어떤 의미였는지를 살펴보자. 1986년에 간행된 『사회과학의 현재』(미래사)의 맺음말에서 그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오랜 세월 나는 시민사회파의 조류 속에서 특수한 구조성을 짊어진 근대일본을 비판적으로 고찰하는 시각을 견지해왔고 서구근대사회의 이념화된 상을 기준으로 삼아왔다. 그러나 1970년대 이후 근대서구사회 자체의 거대한 구조변화에 눈을 돌림으로써 근대에서 현대로의 이행이라는 새로운 시각을 갖추지 않으면 안된다고 생각하게 되었다.”

그는 이에 대한 ‘응답’으로 『현대사회의 역사적 위상』(일본평론사, 1982년)을 저술했다. 이 저서는 1970년대의 모색을 정리한 것이며, 그 후 새로운 방향성을 탐색하고자 한 것이 『사회과학의 현재』이다.

그러나 야마노우치는 출간 직후 이 논문집을 절판했으며 다시금 『니체와 베버』(미래사, 1993년)를 저술하는 등 대전환에 이은 모색을 반복해왔다. 이 모색 속에서 사회과학의 탐구와 병행하여 총력전체제론을 구상한다.

이와 별개로 이 시기 야마노우치의 관심은 ‘시민사회파의 이론적 맹점’을 검토하면서 그 해답을 이론적으로 검토하는 한편, 역사적으로 총력전 하에서 전개되었던 ‘사회과학의 변질(패러다임 체인지)’에 착목한다. 그리고 이 양자를 합쳐 총력전체제론을 고찰하고자 했던 것이다.

이러한 논의의 지평 속에서 야마노우치는 ‘1990년대의 나는 이른바 한 꺼풀 벗겨졌다’(「총력전ㆍ글로벌리제이션ㆍ문화의 정치학」『일본의 사회과학과 베버 체험』(築摩書房, 1999년))라고까지 말한다. 1980년대 후반 이후 야마노우치에게 총력전체제는 이 정도로 중요한 위치를 점한다.

앞서 언급했던 것처럼, 야마노우치는 도쿄대학 경제학부에서 오오츠카 히사오(大塚久雄)에게서 사사받았다. 산업혁명(세계자본주의)의 고찰에서 그 지적탐구가 시작되었고, 『영국산업혁명의 사적분석』(青木書店, 1966)이 이때의 성과물이다.

야마노우치는 계속해서 마르크스의 세계사 인식을 고찰하여 『마르크스ㆍ엥겔스의 세계사상』(미래사, 1969년)을 집필한다. 그는 전후의 사회과학을 압도했던 마르크스의 이론, 그 전후적 해석을 정면으로 다루었다. 이 저서는 아시아적 생산양식 논쟁과 복선형의 역사발전단계론의 융성 등 당시 ‘발전도상국’에 대한 고양된 관심에 조응하여 마르크스의 역사인식으로 전개된 다양한 논의에 대한 야마노우치의 응답이라고 할 수 있다. 오오츠카사학(大塚史學)의 멤버이자 요절한 아카바네 히로시(赤羽裕)의 『저개발경제분석서설』(岩波書店, 1971년)에 대해서도 그는 크게 공감했다. 주목해야 하는 것은, 야마노우치의 『마르크스ㆍ엥겔스의 세계사상』은 ‘시민사회파’의 마르크스 이해와 더불어 그에 공진하여 상호보완관계를 형성한 ‘전후역사파’에 대한 도전이라는 점이다.

전후사회-전후사상의 핵심인 ‘시민사회파’와 ‘전후역사파’. 그 성과를 충분히 섭취하면서 그 이론적 틀을 검토하는 것이 야마노우치의 출발점이었다.

그 후, 야마노우치의 관심은 마르크스의 초기사상에 대한 고찰로 돌아서서 1976년부터 78년에 걸쳐, ‘초기 마르크스와 시민사회상’이라는 제목으로 마르크스의 『경제학ㆍ철학초고』를 검토한 논고를 연재해나갔다(『현대사상』1976년 8월~78년 1월). 이 논고는 소외론에 착목하여, 후기 마르크스를 규준으로 삼았던 철학자 히로마츠 와타루(廣松渉)와 긴장관계를 형성했다.

이 작업은 후에 『수고자(受苦者)의 시선』(青木社, 2004년)으로 출간되었는데, 앞서 언급한 『현대사회의 역사적 위상』도 이 흐름 속에 있다. 이 책에는 ‘소외론의 재구성을 위하여’라는 부제가 달려있다. 『현대사회의 역사적 위상』에서는 마르크스의 후기사상에는 사라진 ‘포이에르바하의 모멘트’에 관심을 돌렸다.

나아가 『현대사회의 역사적 위상』에서는 베버의 주저인 『프로테스탄티즘의 논리와 자본주의 정신』에 착목하여 베버에 대한 새로운 해석을 시도하여 (오오츠카 히사오로 대표되는) 이제까지의 베버 해석을 비판하고 파슨즈와 시스템론을 검토했다. (마르크스와 베버라는) ‘시민사회파’와 ‘전후역사학’의 이론적 지주(支柱)에 대한 야마노우치만의 검토가 이렇게 이뤄진 것이다.

이때 야마노우치가 소외론에 착목한 것은 1970년대를 축으로 하는 세계이해가 소외론에 응축되어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야마노우치는 ‘마르크스의 체계적 이해’ 그 자체를 목적으로 한 것이 아니라 마르크스 이론의 전용(全容)을 밟아가면서 ‘역사적 현실에 마르크스의 논의를 어떻게 적용할 것인가’(『수고자의 시선』)에 주안점을 두었다. 이것은 마르크스에 안주하지 않고 이론을 발전시켜왔던 야마노우치의 자세와 상통한다.

1980년대 후반 야마노우치는 『현대사회의 역사적 위상』에서 제시한 이론적 틀에서 한발 더 나아간다. 이 시기 야마노우치의 관심은 다시금 니체로 향한다. 『사회과학의 현재』와 『니체와 베버』는 니체를 축으로 사회과학을 재검토하고자 한 시도였다. 이것은 ‘니체의 논리에 의한 니체 비판’이라는 성격을 갖는다.

총력전체제론은 이 시기의 야마노우치에 의해 선택된 주제에 다름 아니다. 총력전체제와 니체에의 착목은 자본주의 분석을 축으로 근대사회를 고찰한 야마노우치의 관심과 고찰의 대전환이었다. ‘근대비판’과 ‘현대사회’에 대한 고찰의 개시였다.

1980년대 후반은 세계사적으로 거대한 전환기였다. 1989년 전후를 반환점으로 하는 냉전체제의 붕괴, 이미 진행된 새로운 지(知)로서 ‘현대사상’의 활황, 그리고 일본경제의 난숙기로서 버블화가 시작된 시기였다.

이 사태를 야마노우치는 (근대사회에서) 현대사회로의 전환으로 보았으며 그 기점을 총력전체제에서 구한 것이다. 이러한 탐구의 궤적이 1980년대 후반의 야마노우치에 담겨있다. 총력전체제론은 야마노우치 스스로가 자신의 사고를 나선형으로 단련하고 그로부터 쌓아올린 사고를 해체하면서 재조립한 그의 작업의 일부이다.

 

3.

총력전체제론은 「전시동원체제의 비교사적 고찰—오늘날의 일본을 이해하기 위해」(『세계』1988년 4월, 본서 제2장)에서 처음으로 제창되었으며, 『총력전과 현대화』(1995년)가 그 체계적인 저서가 되었다. 『세계』논문이 『총력전과 현대화』로 이어졌고, 그로부터 15년간 야마노우치는 총력전체제론에 집중했다.

총력전체제론은 이제까지 ‘시민사회파’와 ‘전후역사학’이 제국주의의 맥락에서 파악한 전쟁(제2차 세계대전-아시아ㆍ태평양 전쟁)을 ‘총력전’으로 규정한다. 나아가 그는 ‘총력전’에 대한 세계상의 재해석, 역사인식의 전화, 역사분석의 방법적 검토를 행하고 그 현재적 위상을 새롭게 측정하고자 했다.

야마노우치는 총력전체제론을 프로젝트로 기획하고 수많은 국내ㆍ국외 연구자를 끌어들여 공동연구로 조직한 다음 그 연구 성과를 『총력전과 현대화』로 제출했다. 야마노우치는 권두에 「방법적 서설—총력전과 시스템 통합」(본서 제3장)을 실었다.

『총력전과 현대화』는 「제1부 총력전과 구조변혁」「제2부 총력전과 사상형성」「제3부 총력전과 사회통합」으로 구성되어 ‘총력전체제에 의한 사회의 편성교체’를 주장한다.

“우리들은 국민국가가 제2차 세계대전기의 총동원제체에 의해 (계급사회로부터) 사회 시스템통합이라는 단계에 이르게 되었음을 확인하고, 그것을 출발점으로 하여 현대의 문제성을 다루고자 했다.”(「편집방침에 대하여」)

총력전체제론은 총력전으로 운영되는 전시총동원체제의 형성을 사회적 재편성의 과정으로 파악하고 그로부터 ‘현대화’가 진행되어 ‘계급사회에서 시스템사회’로 이행된다는 인식을 갖는다. 가족-시민사회-국가라는 근대사회를 만들어낸 영역구분이 해체되고 사회는 ‘사회시스템의 전체적 운영’이라는 관점으로 통합된다고 야마노우치는 주장한다.

총력전체제 하에서 진행된 시스템 사회화. 여기에서 ‘계급이해의 대립’은 ‘제도적 조정’의 대상이 되어 국가적 공동성을 향해 사회의 통합화가 추진된다. ‘복지국가는 전쟁국가’이며, ‘사회국가적인 복지체제’는 총력전 하에서 ‘하나의 이념’이 되기도 한다고 야마노우치는 주장한다.

이러한 야마노우치의 총력전체제론은 3중 구조를 갖는다. 즉 ① 이론적 수준에서 ‘계급사회에서 시스템사회’를 말한다. ② 역사적 고찰로서 ‘전시동원체제’의 전개를 구체적으로 묘사한다. 총력전체제 과정에서 공ㆍ사의 구별은 모호하며 사람들은 새로운 ‘국민’으로 파악되고 그 속에서 전쟁수행의 ‘합리화’가 지향된다. 그와 더불어 ③ 총력전체제 하에서 (‘위태로움’과 ‘새로운 수준’을 함께 부둥켜안으며) 사회과학적 지식도 전회하게 된다. 야마노우치는 이 세 수준의 복합을 고찰대상으로 하여 총력전체제론을 구축하고 그 분석을 행했다.

특히 그가 심혈을 기울인 부분은 ③의 논점이다. 예를 들어, 오오코우치 가즈오(大河内一男)의 전시 운영을 ‘참가와 동원’—‘전시동원체제의 합리적 설계를 기획하고 참여하는 것을 결의한다’(「전시기의 유산과 그 양의성」 본서 제5장)—이라는 관점의 도마 위에 올려놓는다. 오오코우치는 총력전이 계급관계를 뛰어넘으며 당연히 있어야 할 사회정책을 ‘현실’의 문제로 만드는 환경이라고 인식하고 이 인식에 의거해 ‘큰 방향전환’을 했다 라고 야마노우치는 주장한다. ‘근대의 원점’을 성립하는 ‘개인’과 결별하여 (오오코우치는 새롭게) ‘사회적 시스템의 총체’라는 입장을 선택했다는 것이다.

야마노우치가 총력전체제 하에서 ‘국가의 성격’이 변했다는 오오코우치의 인식과 재평가를 지적하는 것은 바로 여기서 ‘전시기 지식인’의 ‘이론적 전향’—‘사회과학은 이제야 사회 운영을 그 바깥에서 관찰하는 것이 아니라, 사회시스템의 기능적 운행의 역할을 짊어진 장치의 하나로 자리매김했다’(「일본의 사회과학과 베버체험」 본서 제6장)—을 발견했기 때문이다.

물론 이러한 지식인의 ‘전향’[転身] 내지는 ‘전회’(転回)는 예전부터 착목된 바이며, 오오코우치의 경우에도 ‘전향’[転回]으로 다뤄져왔다. 그러나 ‘예외적 사례’로 다뤄져온 것에 반해(石田雄 『일본의 사회과학』 동경대학출판회, 1984년 등), 야마노우치는 이 전향이야말로 주요한 흐름이라고 주장했던 것이다.

이 논점은 ‘시민사회파’에 의해 이론적ㆍ역사적으로 검토되었다. 오오코우치를 필두로 오오츠카 히사오(大塚久雄), 마루아먀 마사오 등이 주도한 전후 프로젝트는 전시프로젝트의 전후적 이해로 새롭게 위치 지었다. 야마노우치는 (‘시민사회파’의 자기상(自己像)처럼) 전후에 일어난 것이 아니라 (총력전체제론으로서) 전시에 일어난 것을 발견해내고자 했다.

이렇게 전시기에 일어난 변화를 ‘사회과학의 변질’로서 ① ‘시민사회파’는 ‘무자각’했다(전시기의 전향이 아닌 전후 전향)고 말하고 그 반전으로서 ② 자신의 작업은 이 지점에 준하면서 ‘시민사회파’를 비판하고자 했다. 따라서 ③ 오오코우치의 주장 및 오오츠카, 마루야마의 이해를 ‘근대로의 회의’(‘근대의 초극’)를 축으로 재구성한 것이 야마노우치의 총력전체제론의 요지이다.

또 하나, 총력전체제는 전쟁을 ‘전투’에서 분리하여 사회편성-시스템으로 파악한다. 이 속에서 스탈리니즘, 뉴딜, 파시즘이 병치되고, 총체로서 근대가 비판된다. 야마노우치는 현대사를 파시즘과 뉴딜의 ‘대결’로 그려내기 이전에도 총력전체제에 의한 ‘사회의 편성교체’로 파악하여, ‘파시즘형’과 ‘뉴딜형’의 차이를 총력전체제에 의한 사회적 편성교체의 분석 속에서 ‘내부의 상위구분’으로 이해했다.

이것은 전시의 평가를 둘러싼 논의임과 동시에 전후에 이뤄지는 전시평가의 기준을 둘러싼 논쟁이며 전후와 현재의 역사적 평가를 둘러싼 문제의식에 다름 아니다.

야마노우치에게서 전시하의 ‘합리성’에 관한 논의는 저항이 아닌 전시동원의 국면에 있으며, 그 동원으로 대표되는 전시의 ‘합리성’이 전후를 만들어내었다는 인식에 있다. 이 관점에 의해 그의 총력전체제론은 전시-전후의 연속/단절에 머물지 않고 그 단절을 뒷받침한 인식과 방법 그 자체에 문제를 제기한다.

이처럼 그의 총력전체제론은 ‘시민사회파’를 역사적ㆍ논리적, 전시의 행위ㆍ전후의 해석 등 이중삼중의 복합적인 비판을 논한다. ‘시민사회파’의 평가와 더불어 ‘시민사회파’가 그려낸 역사상, ‘시민사회파’의 역사적 인식이 총력전체제론에 의해 반전된다. ‘시민사회파’가 전시의 저항을 뚫고 전후를 이끌어 전후민주화를 추진했다는 구도와 역사상, 그것을 지지하는 역사인식에 정면으로 도전한 것이다.

한편, 야마노우치는 전투가 끝나도 총력전하에서의 시스템통합은 계속 진행되어 현대사회의 시스템을 통합한다는 주장한다. 즉 그는 전시-전후의 단절/연속이라는 담론에 대해 네오연속설을 새롭게 주창한 것이다. 그는 1945년 8월 역사가 절단된 것이 아니라고 주장하며 그 연속성에 착목했다.

이러한 총력전체제 인식은 이제까지 논의된 일본의 ‘특수성’이 아닌 ‘보편성’의 맥락에서 일본을 파악하는 것이다. 일본의 ‘특수성’이 전쟁에 이르게 한 것이 아니라며, 합리성이라는 ‘보편성’을 전쟁 속에서 찾아내고자 했다. 따라서 여기서 발견되는 것은 총력전을 수행한 ‘근대’에 대한 비판—‘근대비판’(야마노우치는 ‘근대의 초극’이라는 표현을 종종 사용했다)이며, 이제까지 근대비판으로 간주된 것은 ‘근대화’ 비판이었다고 그는 지적한다.

이는 ‘시민사회파’와 ‘전후역사학’이 ‘유럽의 근대’를 모델화하는 인식에 기반한다는 비판인 것인데, 야마노우치는 파슨즈, 프랑크푸르트학파의 논의를 염두에 두고, 시민사회가 그 자체의 전향 속에서 시스템사회로 ‘변질’되었다는 견해를 피력한다. 즉 근대 그 자체의 근거 속에서 ‘전체주의화와 재봉건화’의 경향이 ‘내포’되어 있다는 것, 그리고 마르크스도 베버도 ‘유럽의 근대’를 모델로 한 것이 아니라 근대가 가진 ‘합리성’을 비판하고 그로부터 발생하는 소외를 논했다고 해석한다.

큰 논리-인식의 틀로 제출된 총력전체제론은 따라서 전후의 인식-전후사의 과정을 비판적으로 고찰한다. 오해를 불러일으킬 수도 있겠지만, 총력전체제론은 ‘시민사회파’와 ‘전후역사학’이 그려낸 도면을 지면과 바꾸는 작업이다.

전후비판으로서 총력전체제론은 1940년 체제론(노구치 유키오(野口悠紀雄) 『1940년 체제』 동양경제신보사, 1995년)과의 차이를 언급해둘 필요가 있다. 노구치는 부제에 ‘안녕 전시경제’라고 하며 현재가 ‘전시경제’로부터의 전환기라고 말한다. 총력전을 이끌었던 전시체제가 전후 일본경제에 크게 기여했으며, ‘일본형경제시스템’이 전시기에 탄생했다는 인식이 그 배후에 존재한다.

야마노우치가 전시와 전후를 관통하는 총력전체제를 부정적으로 파악한 것에 반해 노구치는 40년 체제가 고도경제성장을 실현시켰다고 긍정적으로 말한다. 그리고 노구치는 그 후 일본경제의 미래의 전개를 열어가기 위한 탈각기로서 90년대를 위치 짓는다. 나아가 노구치는 이 시기를 ‘특수’한 시기로 파악한다는 점에서 야마노우치와 다르다.

 

4.

야마노우치가 제기한 총력전체제론의 의의와 특징은 1980년대 일본과 세계의 변화양상, 그리고 그와 더불어 ‘지’의 변화를 응시하는 새로운 사회이론의 구축에 있다.

‘일본’에 초점을 맞추면, ‘전후’에서 이륙하여 이제까지 ‘서양’에서 모델을 구한 상황에서 그 반대로 ‘일본’을 모델로 삼는 양상이 발생해왔으며(예를 들어 앞서 로날드 필립 도어의 『영국의 공장ㆍ일본의 공장』등), 그와 병행하여 포스트모던의 논의가 활발히 진행되었다.

한편, ‘세계’에서는 전후의 국제관계를 규정해왔던 냉전체제가 붕괴하고 사회과학을 포함하여 냉전체제-전후의 가치를 축으로 삼은 지적작업 그 자체의 역사화의 필요성이 제기되었다. 그 양방에 주목한 것이 총력전체제론이다.

그리하여 총력전체제론은 냉전붕괴의 예감 속에서 논의를 전개해간다. 1990년을 전후하여 ‘69년’의 총괄이라는 국면을 맞이한 것이다. 총력전체제론은 강단파 비판, ‘시민사회파’ 비판, 근대비판이며, 전후사상에 대한 총비판이다.

이것은 야마노우치의 총력전체제론이 『총력전과 현대화』『내셔널리티의 탈구축』(1996년)과 한 세트라는 것을 보여준다. 사카이 나오키(酒井直樹), 이요타니 토시오(伊豫谷登士翁), 브레트 드 바리가 편집한 『내셔널리티의 탈구축』은 사카이 나오키의 서론(「내셔널리티와 모(국)어의 정치」)을 비롯해서 「제1부 내셔널리즘과 콜로니얼리즘」「제2부 표상으로서의 내셔널리티」「제3부 내셔널리티의 현재」 등의 10편의 논문을 모아놓았다. 이 저서는 현재의 내셔널리즘을 역사에 입각하여 정치, 문학, 사회사상 등의 측면을 관계적으로 다루며 비판적으로 고찰한다.

야마노우치는 『총력전과 현대화』에서 이러한 내셔널리즘-국민국가와 결부하여 전개되어온 사회과학에 대한 비판을 시도한다. 총력전체제론은 사회과학의 학지에 대한 비판적 총괄이기도 하다.

공동연구로 진행된 총력전체제론의 일단의 특징을 살펴보도록 하자. 야마노우치의 주창 하에 결집된 이들은 ① 일본에 있는 「일본연구」자 외에 미국의 일본연구자가 핵심적인 역할을 맡았다. 그 외에 독일의 일본연구자, 나아가 비교의 관점에서 각지의 독일연구자도 참여했다. 후에는 오스트리아, 중국, 한국, 캐나다, 프랑스 등지에 있는 연구자도 참여했다.

이렇듯 ‘국경’을 초월한 광범위한 참여는 ② 전문분야의 경계를 넘어섰다. 즉 야마노우치를 전공하는 경제학ㆍ경제사 외에 정치학, 역사학, 교육학, 사회학에서부터 철학ㆍ사회사상, 문학연구까지 인문학ㆍ사회과학의 모든 분야에 문호를 개방했다. 공동연구로서 총력전체제론은 각각의 ‘학지’를 견지함과 더불어 그 ‘학지’가 가진 제도성, 그에 유래하는 자명성을 새롭게 검토하는 작업이었다.

필연적으로 이 공동연구는 ③ 대학이라는 제도를 넘어선 지적인 공동작업이 되었으며 야마노우치의 주변은 ‘지의 양산박(梁山泊)’과 같았다. 연구회에서는 종종 게스트를 초빙하였으며, 해외의 학자와 심포지엄을 공동개최했다. 매년 연구팀을 조직하여 미국을 중심으로 세계각지로 흩어져 논의를 전개했다. 그때 마침 미국의 일본연구가 새로운 전기를 맞이했고, 그 중심에 섰던 코넬대학의 사카이 나오키, 브레트 드 바리(Brett de Bary), 빅터 코쉬만(Julian Victor Koschmann)이 총력전론을 이어받았다.

그 외 캐롤 클러크(콜럼비아대학), 하리 하르트니안(뉴욕대학), 앤드루 고든(하버드대학), 텟사 모리스-스즈키(당시 캘리포니아대학) 등이 일본연구자로 활약하면서 총력전체제론을 전개해나갔다. 또 독일의 독일연구자로서 미하엘 프린츠 등이 참가하여 비교의 축을 복수화했다.

이것은 총력전체제론을 해외로 발신하는 계기가 되었다. 『총력전과 현대화』 영문판은 1998년 코넬대학 출판부에서 간행되었다(Total Warand "Modernization", East Asia Program, Cornell University, 1998, Ithaca). ‘일본’을 사례로 하는 고찰에서, 특히 미국을 필두로 세계로 확장해갔다.

인식의 측면에서는 ‘일본의 특수성’뿐만 아니라 보편성, 그에 수반하는 근대비판, 그로부터 도출되는 현대일본론—현대사회로의 시스템에 대한 고찰로 나아갔다.

총력전체제론은 ‘소국민’으로서 전시기를 보낸 야마노우치가 전후사의 서술방식에 제기한 문제의식으로 군인을 아버지로 둔 개인사의 검증이기도 하다. 그러나 이 문제의식을 지지한 것은 ‘현재’의 인식이며, ‘학지’ 비판의 ‘학지’로 삼았던 야마노우치의 강고한 논리였음을 확인해두고자 한다.

 

5.

야마노우치의 총력전체제론은 여러 의미를 갖는다. 우선 전후의 전쟁의식에 대립한 것이다. 아니, 정확이 말하면 전후-근대-강단파의 견해에 준거하는 (‘시민사회파’와 ‘전후역사학’의) 전쟁관에 대한 도전이며 논쟁이다.

따라서 총력전체제론이 제기되었을 때 그 대응은 크게 둘로 나누어진다. 하나는 (총력전체제론의 이론적 틀에 대한 비판적인 견해로서) 역사학계 주류와의 논의이다. 일례로 1996년 5월 『총력전과 현대화』의 합평회가 행해졌다. 그리고 이때의 논의에 기반하여 『연보 일본현대사』「총력전ㆍ파시즘과 현대사」(제3호, 1997년)가 발간되었다.

그 속에서 아카자와 시로우(赤澤史朗)는 합평회에 대해 ‘진실로 근래에 보기 드물게 뜨거운 논쟁이 전개되어’ ‘당초 예정된 종료 시각을 연장했음에도 논의가 끝날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고 적어놓았다. 아카자와는 ‘일본근현대사의 분야에서 기본적인 틀의 인식에 관한 논의의 결실을 맺고자 한다’며 ‘총력전체제를 어떻게 다룰 것인가’를 특집으로 삼은 의도를 말하고 있다. 아카자와를 필두로 집필에 참여한 필자들은 정면에서 논의를 전개하고 있다.

또 다른 대응은 (총력전체제론의 문제제기를 받아들이면서도 비판적 견해를 보이는) 사회학ㆍ경제학 등의 영역에서이다. 좌담회 「공간ㆍ전쟁ㆍ자본주의」(야마노우치+이와자키 미노루(岩崎稔)+요네타니 마사후미(米谷匡史), 『현대사상』1999년 12월)는 총력전체제론의 의의를 평가하면서 식민지론(외부)이 결여되어있음을 지적하고 있다. 제국분석으로서는 불충분하다는 지적이다.

이러한 논의를 거친 평가로서 우에노 치즈코(上野千鶴子)의 『내셔널리즘과 젠더』(1998년)와 요시다 유타카(吉田裕)의 「근현대사로의 초대」(『이와나미 강좌 일본역사』 근현대Ⅰ, 岩波書店, 2014년)을 들 수 있다.

우에노는 야마노우치의 논의를 네오연속설로 평가하는 한편, 시스템사회화에는 의문을 표하며 평가를 보류한다. 우에노의 문제제기는 국민국가론과 총력전론과의 관계에 있다.

한편 요시다 유타카는 근 20년의 근현대일본사 연구의 총괄을 행하는 속에서 ‘국민국가론’ ‘총력전체제론’ ‘메이지시대의 평가’ 그리고 ‘역사학에서 인식론’을 제기하고 총력전체제론이 종래의 파시즘론의 맥락의 논의와는 다른 ‘새로운 시각을 제공’하며 근현대사연구에 ‘새로운 지평을 열어놓았다’고 평가했다.

나아가 요시다는 총력전 과정에서 차별의 시정과 사회의 평준화가 일방적으로 진행된 것이 아니라는 점, 그렇다면 어느 수준에서 결정적인 전환이 이루어졌는지가 모호하다는 점을 지적한다.

총력전체제론은 이렇듯 하나의 해석적 틀, 역사적 문제설정—패러다임으로 수용되어 논의의 대상이 되었다. 그러나 야마노우치의 관심은 ‘현대’라는 ‘시스템사회’와의 밀접한 관련성에 있기 때문에, 총력전체제론을 주축으로 한 그의 단독논문집은 발간되지 않았다. 총력전체제론의 주요논문은 『시스템 사회의 현대적 위상』(岩波書店, 1996년)과 『일본의 사회과학과 베버체험』(筑摩書房, 1999년)에 분산되어 있다.

본 논문집은 위의 저서에 수록되어 있는 논고를 포함하여 야마노우치의 총력전체제론을 모아 출간한 것이다.

 

6.

총력전체제론 이후 야마노우치의 연구행적에 관해 간단하게 언급하겠다. 야마노우치는 ‘새로운 사회운동’과 글로벌리제이션을 직접적 연구대상으로 삼고 환경문제와 ‘수고적(受苦的) 인간’—하이데거에 대한 관심으로 옮겨져 탐구를 계속해나간다.

‘자본주의의 세계중심부의 사회시스템은 총력전체제를 통과함으로써 대항적 이해를 통합할 수 있었다’는 인식 하에서 그는 ‘근대의 생활원리’의 근거뿐만 아니라, 그 혁명성 속에서 ‘소외로 향하는 전도적(轉倒的) 의식의 동인’과 ‘관료제적 합리화로 향하는 형식성의 동기’를 탐구하고자 했다.

1970년대의 변화에 이어 1980년대 말 자본주의 시스템이 또 한 번의 변용을 맞이했을 때 야마노우치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자본주의 시스템은 총력전 하에서 경험한 첫 번째 변질 이후 글로벌리제이션에 직면하여 두 번째 변질을 경험한다.”

‘거대한 전시동원’—총력전 체제가 만든 사회시스템통합이야말로 글로벌리제이션의 기반이 되었고 ‘두 번의 세계대전과 그 동원체제가 준비한 국민국가적 통합은 그 군사력과 함께 글로벌리제이션 시대의 세계시스템의 유산으로 계승되었다’는 인식을 보여준다.

야마노우치는 글로벌리제이션이라 불리는 사상(事象)을 해명할 뿐만 아니라 현대라는 시대에서 내셔널을 넘어서는 새로운 사상(事象)을 해명하기 위해 다시 한 번 이제까지의 사회과학의 분석적 틀을 되묻고자 했다. 글로벌리제이션 연구를 통해 일본 나아가 ‘서양’ 중심의 사회과학에 도전하는 모습을 보여주었다. 근대적인 지의 존재양상의 한계를 분명히 밝힘과 동시에 근대로 불리는 시대의 전환으로서 글로벌리제이션의 역사성을 재고하고자 한 것이다.

근대사회의 새로운 해석을 거쳐 현대사회에 대한 비판적 고찰로 전개한 것이 야마노우치의 일관된 문제의식이었다. 그 거대한 프로젝트의 하나가 총력전체제론이며, 시대적 변화에 따라 과제를 재설정하고 자신의 이론을 검증하여 새로운 지평을 탐색하고자 했다.

야마노우치가 이론적 지주로 삼은 것은 ‘시민사회파 사회과학’—‘모택동적 마르크스주의’—‘베버ㆍ파슨즈ㆍ마르크스’—‘니체와 하이데거’이며, 어느 시기부터 그는 ‘시민사회파 사회과학’을 비판하기 위해 ‘시민사회파 사회과학’의 이론적 근거를 재해석하여 자신의 이론적 틀을 스스로 허물어갔다. 이 궤적은 전후 일본의 사회과학 그 자체의 궤적과 중첩된다.

 

 

Posted by Sarantoy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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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사상』2015년 2월호에 실린 논문 한편을 번역했다. '반지성주의와 마주하다'는 부제의 이번 호에서 날로 우익화하는 일본의 "역사수정주의"에 대한 글을 번역할까 하다가 신자유주의와 푸코의 논의를 연결짓는 다음의 논의가 조금 더 '지금'의 고민에 맞닿을 수 있겠다 싶었다. 

연구자는 앞선 학자와 그의 이론을 끊임없이 현재적으로 재구성해야 한다. 그것이 학문을 시대 속에서 살아있게 만드는 것이며, 연구자 본인을 사회화하는 방식이다. 다음의 글은 연구자 본연의 역할에 충실한 글이라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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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전하는 주체는 두렵지 않다: 푸코와 신자유주의, 반지성주의

하코다 테츠(箱田徹, 사회사상사)

 

“경영자를 비롯하여 국민 한 사람 한 사람이 ‘활기에 찬 일본의 부활’을 위해 신진대사의 촉진과 이노베이션(innovation)에 맞서는 ‘도전하는 마음’을 회복하고, 국가는 이를 서포트함으로써 ‘세계에 으뜸가는 비즈니스 환경’을 정비한다.” -수상관저-

“그러나 우리는 복지국가가 끝났다고 눈물을 흘리거나 하지 않는다. 복지국가란 정신과병원이기도 하며, 장애자시설이기도 하며, 형무소이기도 하며, 가부장제적이고 식민주의적이고 이성애주의적인 학교이기도 하다.” -베아트리스 프레시아도(Beatriz Preciado)

“이제 인턴도 누구나 거쳐 가는 과정이 되었다. 주변에 휩쓸려갈 뿐.”

  작년 10월말, 비상근[시간강사]으로 담당했던 ‘글로벌커리어’라는 제목의 강의에서 어떤 학생이 이렇게 발언한 것에 대해 학생들은 저마다 한마디씩 의견을 말하며 강의실은 열띤 토론의 장이 되었다. 인턴 설명회나 면접 때문에 수업에 나올 수 없다고 연락하거나 수업 도중에 빠지겠다고 하는 등 취업활동의 홍보가 개시된 후 3개월 정도는 취업활동과 수업이 겹치는 것을 기업이 이해해주지 않는다는 것쯤은 다들 알고 있다. 그러나 그것을 개별 기업의 무책임으로 떠넘기려는 것은 아니다. 수강생의 대부분은 일본사회 전체에서 보면 혜택 받은 환경에서 성장했고, 버블기의 신세대였던 학생들의 깜짝 놀랄 에피소드와 비교해서도 그 조급함과 절실함이 지금에서야 시작된 것이 아니라고 말할 수 있기 때문이다.

  경제적인 여유가 없을 뿐만 아니라 취직한다 해도 결코 평안 무사할 수 없는 불안정한 상황에서 유일한 바람은 자신의 현재 능력과 미래의 커리어뿐이다. 그런 생각이 이상할 것 없는 학생들로서는 사람이 노동을 통해 얻는 것은 자금이 아니라 자신의 자본주식에 합당한 소득이라는 인격자본이라는 견해가 설득력 있을지도 모르겠다. 리처드 홉스테터(Richard Hofstadter, 1916~70, 미국의 정치학자)가 『아메리카의 반지성주의』에서 언급한 인텔리전스(능력)와 인털렉트(지성)의 잘 알려진 대비에 따르면, 사물을 비판적으로 다루는 지성인이 되기보다 정보수집과 문제해결에 뛰어난 능력자가 되어 스스로의 인격자본 가운데 지금부터라도 가능한 부분을 고도화하는 것이 첩경이다. 이제 국가는 ‘세계에 으뜸가는 비즈니스 환경’을 정비해가며 그에 ‘편승’할 수밖에 없지 않은가.

  그러나 그와 동시에 학생은 능력자를 목표로 하는 혹독함과 그럼에도 장래를 보중해주지 않는다는 것을 직감하는 것 같다. 한편, 격주로 강의에 출석하는 게스트 강사는 비판적인 사고를 단련하고 필요한 기술을 익히면서 하고 싶은 일이 무엇인지 생각해보라는 메시지를 던진다. 능력과 지성의 관계는 쉽게 이해되는 것이 아니다. 학생과 우리를 둘러싼 상황에야말로 반지성주의적인 움직임을 극복할 어떤 계기가 있을지 모른다. 나는 그것을 푸코의 아메리카 신자유주의의 통치론을 통해 생각해보고자 한다.

 

  1. 신자유주의자 푸코

  작년 12월말 푸코에 관심 있는 사람들 사이에서 화제가 됐던 인터뷰가 있다. 벨기에의 사회학자 다니엘 자모라의 「푸코를 비판할 수 있을까」라는 제목의 인터뷰가 그것이다. 프랑스어 잡지인 『밸러스트』의 웹사이트에 게재된 시점에서는 전혀 주목받지 못하다가 아메리카의 좌익잡지 『자코뱅』사이트에 영역되어 게재되면서 화제로 떠올랐다. 12월 11일자 워싱턴포스트지의 웹사이트에서 국제정치학자인 다이엘 드레즈너(Daniel Drezner)가 다루었던 것도 한몫을 담당했을 것이다. 타이틀은 아이러니하게도 「푸코가 리버타리안(libertarian 자유방임주의자)의 최고의 친구인 이유」이다. 아카데미즘에서 마르크스주의의 쇠퇴 후 등장한 이가 푸코이며, 그 영향력은 막대하다. 그런데 자모라에 따르면, 푸코는 좌익이 끊임없이 비판하는 신자유주의의 경제사상에 호의적이었다. 드레즈너는 자모라의 인터뷰를 길게 인용한 후 보수파에게 혐오하지 말고 한번 읽어볼 것을 권하고 있다. 푸코의 저작은 ‘마르크스보다 다루기 쉬우며 경제학적으로도 그다지 위험하지 않다. 푸코의 사상을 베이스로 하는 학자는 구래의 마르크스주의학자보다 훨씬 신자유주의와 친화도가 높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드레스너의 반지성주의적인 태도는 지나치게 노골적이지만, 정치적인 좌우를 불문하고 드레즈너와 자모라가 말하는 것과 같이 푸코가 신자유주의에 호의적이었다는 논의는 비록 소수이지만 이전부터 존재해왔다. 특히 1978~79년의 콜레주 드 프랑스 강의록 『생명정치의 탄생』은 그 후반부에서 제2차 세계대전 후의 신자유주의 경제학을 상세하게 언급하면서 주목받았다. 푸코를 좌익아카데미즘의 대명사로 간주하는 사람들이라면, 푸코로부터 하이에크, 프리드만, 베커라는 이름이 나오는 것 자체에 신선한 충격을 받을 것이다. 그것도 몇 번이나 논의되었다는 것은 푸코에게 그러한 요소가 포함되어 있다는 것 아닐까? 자모라의 비판을 살펴보자.

  자모라는 ‘푸코는 생전에 신자유주의를 정면으로 비판한다는 상투적인 이미지와 결별하고 싶었다’고 하며, 『생명정치의 탄생』뿐만 아니라 푸코의 생전 인터뷰 등을 보면, 푸코는 자유주의 경제사상에 강하게 경도되었다고 주장한다. 왜냐하면 ‘그는 그곳[자유주의 경제사상]에서 자신의 눈으로는 완전히 시대에 뒤떨어진 사회주의와 공산주의를 제기하는 좌익세력보다도 규범적이지도 권위적이지도 않는 통치성의 형태를 보았기’ 때문이다. 방증으로 드는 것은, 구통일사회당과 내셔널센터의 CFDT(프랑스민주주의노동동맹, 당시 총재는 에드몽 메르(Edmond Maire))라는 68년 5월에도 활약했던 두 세력이 1970년대 중반 사회당으로 합류하여 당 내외에서 ‘제2의 좌익’ 노선을 걸으며 푸코에 근접해갔다는 것이다. 이 세력은 사회당과 공산당의 관점에서 본다면 국가중심형의 사회주의 노선(‘제1좌익’)에 대항하여 ‘자주관리’를 슬로건으로 내세웠다. 푸코는 1981년 이후 CFDT와 폴란드의 ‘연대’지원과 협력관계였다고 알려져 있다. 프랑스의 ‘68년 5월’ 이후의 좌익주의 운동과 비판적인 사조의 고양은 70년대 중반 이후 운동의 퇴조와 신철학파의 등장과 함께 변모했으며, 1981년 미테랑 정권이 성립된 이후 좌익의 리버럴화(중도화)가 급속도로 진행되었다. 이러한 전체적인 맥락과 푸코의 지적인 변천이 일치한다는 것이 자모라의 주장의 기본구도이다.

  한편, 콜레주 드 프랑스에서 푸코의 조수이기도 했던 영국의 연구자 콜린 고든은 사회민주주의에 신자유주의적인 전략이 일부 도입되었다는 의미에서 푸코가 블레어(영국의 노동당 출신의 수상)적인 제3의 길을 앞서 제기했다고 말했다. 자모라는 이를 인용하여 논의를 진행한다. 푸코가 좌익 속에서 프리드만파의 텍스트를 처음부터 착실하게 읽어갔다는 것을 평가하면서 푸코의 신자유주의에 대한 호의적인 관심은 당시 프랑스 사회보장제도개혁과 밀턴 프리드만(Milton Friedman)의 마이너스소득세에 대한 관심과 같은 선상에 있다고 지적한다. 그와 동시에 사회보장제도는 사회운동의 세력을 거세하기 위한 것이라고 하며, 국가통제의 수단이었던 복지국가에 대한 고전적인 비판을 복수의 사상가의 이름을 들어 비판하기도 한다.

  이 점에 대해 자모라는 최초의 인터뷰에 대한 반향을 받아 작성한 텍스트에서, 복지국가가 전환점에 있다는 진단 그 자체는 드문 것이 아닌데 푸코는 복지국가를 넘어서 사회주의만을 목표로 한 것이 아니라 ‘복지국가의 파괴에 적극적으로 공헌했다’고 말한다. 푸코는 생전의 인터뷰에서 사회보장제도를 둘러싼 개인의 건강이나 보건에 관한 욕구가 보편적인 형태로 채워질 수 없으며, 건강의 ‘권리’라는 사고방식에 의문을 표하는 한편, 그 욕구의 확장에는 제동장치를 걸 수 없다고 지적했다는 것이다. 이러한 사고방식은 건강보건을 소비와 선택의 문제로 파악하는 신자유주의 경제학에 편승하는 것이며 사회적 자유주의나 제3의 길이라는 현대사민주의와 다를 바가 없지 않는가? 반면 현재의 좌익이 요구하는 것은 사회보장제도나 복지국가를 신자유주의의 공격으로부터 옹호하는 것이며 그와 동시에 공평하고 민주적인 사회를 목표로 하는 것이 아닌가? 라는 것이 자모라의 결론이다.

 

  2. 전간기(戰間期)에 등장하는 세 개의 통치성-복지국가, 전체주의국가, 신자유주의국가

  푸코는 서방선진국의 통치의 양태의 변용과 복지국가의 위기라는 두 개의 논점을 ‘안전성’(security)이라는 하나의 단어로 정리하고자 했다. 자모라는 어쩐지 여기서 망설이는 것 같다. 확실히 신자유주의에 대한 대항축은 무엇인가 라는 질문에 푸코는 특정의 제도적인 틀을 제시하지 않았다. 푸코의 신자유주의론에 대한 불만과 비판, 그리고 의외의 평가의 대부분은 이러한 태도에 기인한다. 푸코가 1970년대 말 복지국가의 현황에 내린 비판을 당시의 이론적 지형에 위치지어보자.

  20세기 후반 유럽에 등장한 국가의 통치의 존재방식은 세 가지라고 푸코는 말한다. 전체주의국가와 복지국가, 그리고 신자유주의국가가 그것이다. 푸코가 말한 ‘전체주의국가’란 19세기 이후 시대를 특징하는 존재로서 정당과 그 이데올로기에 의해 지배되는 국가를 가리킨다. 1977년의 통일사회당의 주간신문에 게재된 인터뷰에서는 다른 곳에서 상세하게 논의한 ‘전체주의국가’의 정의를 다음과 같이 간결하게 정리한다.

  “국가의 사명이란 전체주의가 되는 것, 즉 모든 것을 적확하게 제어하는 것에 있습니다. 그렇다고는 하나, 엄밀한 의미에서 전체주의국가라는 것은 정당, 국가장치, 제도에 기초한 시스템, 이데올로기가 하나가 되어 위에서 아래로 균열과 틈새, 일탈이 거의 없이 제어되는 국가를 말하는 것이겠죠. / 온갖 제어장치가 단 하나의 피라미드로 구성되어, 다양한 이데올로기, 언설, 행위를 하나의 바위덩어리로 만드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와 동시에 푸코는 이러한 타입의 국가는 과거의 것이라고 강조한다. “전체주의는 꽤 오랜 기간 파시즘이나 스탈린주의의 어느 타입의 명확한 체제를 가리켜왔습니다. 오늘날 우리는 그 부활을 목도하지 않습니다.” 이 인터뷰는 바더마인호프그룹(Baader Meinhof Gruppe, 독일적군파)의 변호사 크라우스 크로와상의 서독일로의 강제송환문제를 둘러싸고 행해진 것인데, 그의 전체주의국가에 대한 비판은 이 인터뷰의 논점에서 벗어나 있다는 주장은 ‘파시즘’으로 몰리기 쉬운 의회 밖 좌익의 현상인식에 대한 문제제기이기도 했기 때문에서이다.

  국가권력이 연속적 및 항상적으로 진화해간다는 인식은 ‘국가혐오’ 즉 국가권력의 비대화에 대해 좌익과 보수파가 다른 형태로 품는 경계심의 하나의 타입이다. 이 감각은 각각의 국가와 제도 혹은 통치성의 종별성(種別性)을 상실시킬 수 있으며 사회보장과 강제수용소를 동일시하는 것에까지 나아갈 수 있다고 푸코는 말한다. 한편, 현상의 종별성을 나타내는 단어로 사용된 것이 ‘안전성’이다.

  “국가와 주민 사이의 관계는 현재, 본질적으로는 소위 ‘안전성의 계약’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중략] 일찍이 이 관계는 영토계약으로서, 국경을 지키는 것이 국가의 주요한 기능이었습니다. / 오늘날 국경은 거의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국가가 주민에게 계약으로 제시하는 것은 ‘당신을 지킬 수 있다’는 것입니다. 다가올 수 있는 모든 사고, 손해, 위험으로부터의 보호입니다.”

  국가를 외부의 적으로부터 방위하는 것에서 불확실한 사상(事象)에 대한 안전성의 제공에까지 국가와 주민의 관계는 변화한다. 경계할 수밖에 없는 대상은 국가 밖에 있지 않고 국가의 내측이 있다. 테러리즘이 문제시되는 것은 국가가 보호해야 하는 주민의 안전성(치안)을 의도적으로 혼란시킬 뿐만 아니라 개인을 보호해야 하는 제도와 개인 사이의 안정의 관계 자체를 흔들어놓기 때문이다. 통치라는 시각에서 보면, 이것은 통치하는 측과 통치당하는 측의 관계변화로 파악된다. 국가의 주요한 역할은 군비와 대외전쟁을 통해 외국으로부터 자국을 지키며 주민의 생명의 안전을 보장하는 것에서 국내에 개인과 사회에 일어날만한 위험으로부터의 보호를 제공하는 것이 된다.

  사회보장(소셜 세큐리티)이 이 두 가지의 통치성을 잇는 열쇠이다. 광의의 사회보장정책을 국가레벨에서 실현하는 복지국가를 떠받치는 것은 국가와 국민을 연결하는 어떤 종류의 사회계약이며, 베버리지 보고서(Beveridge Report, 1941년 영국에서 창설한 <사회보험 및 관련사업에 관한 각 부처의 연락위원회>의 위원장인 베버리지가 1942년에 제출한 보고서)는 그 대표적인 사례이다. 그런데 1942년에 제출한 이 보고서는 ‘전쟁계약’으로도 볼 수 있다고 푸코는 말한다.

  “그러한 사회계약에서 [제 국가는]—전쟁을 행하는 것, 따라서 살해하러 가는 것을 요구받는 사람들에 대해—어떤 타입의 경제조직, 사회조직에 의한 다양한 안전성(고용보장, 질병이나 예상치 못한 사태의 보장, 연금보험)을 제공하는 계약이었다. 전쟁이 요청되는 그 때에 보장계약이 행해졌던 것이다.”

  자발적으로 전쟁에서 죽을 가능성을 조건으로 내걸고 그것과 맞바꿔 사회보장의 수급자격을 얻는다는 구도는 ‘총력전체제와 더불어 복지국가 혹은 사회국가가 성립했다’는 논의선상에서 보면 새로운 것은 아니다. 그러나 푸코가 말하고자 한 것은 전쟁과 통치, 통치자와 피치자의 관계라는 관점에서 다음의 두 지점이 동시에 그려질 수 있다는 것이다. 하나는 복지국가에 의한 주민의 배제와 포섭(혹은 생명정치)이 그 당시의 전환점이었다는 것, 또 하나는 전체주의국가와 복지국가에 대한 반응 혹은 비판으로서 신자유주의라는 새로운 통치의 존재방식이 나타났다는 것. 이 두 지점에서 우익의 국가혐오를 설명해낼 수 있다. 신자유주의라는 경제사상이나 정책이념은 케인즈주의와 전체주의에 대한 반대, 바꿔 말하면 집산주의와 계획주의라는 의미에서의 국가의 경제개입에 반대하는 입장 하에서 전간기(戰間期)에 형성되었던 제 조류이며, 전후 앵글로색슨형의 신자유주의와 대륙유럽형의 신자유주의로 갈린다. (이에 대한 상세한 논의는 필자의 『フーコーの戦争—<統治する主体の誕生>』(2013年)의 3장 참조) 여기서는 후자의 지점만을 살펴보고자 한다.

  『생명정치의 탄생』의 1979년 3월 7일의 강의에서 프랑스의 복지국가체제가 1970년대에는 모두 전환점을 맞이했다는 진단 하에 당시 보수정권에서 마이너스소득세가 검토되기에 이른 경위를 상세하게 다룬다. 확실히 푸코는 마이너스소득세라는 구상 속에서 ‘전쟁계약’에 기초한 완전고용형 복지국가와 국민연대의 모델을 방기함과 더불어 절대적 빈곤개념의 도입과 비규율적인 지원의 메커니즘을 간파했다. 그런데 자모라가 주장하는 것처럼, 이 분석의 동기는 신자유주의적 정책으로의 사상적 접근이 아니라 국내경제가 전환점을 맞이한 프랑스에 있어서 사회정책의 개혁동향에 대한 관심일 것이다. 실제로 69년 이후 경제의 추락과 73년의 석유파동을 거쳐 74년에 성립된 지스카르 데스탱 정권하에서 시작된 움직임을, 푸코는 ‘현재 문제인 것은 포괄적으로 신자유주의적인 정책 하나가 짊어져야 할 전체’로서 묘사하고 있다.

  푸코는 1970년대의 프랑스는 이중의 의미에서 안전성이 전환점을 맞이했다고 생각했다. 한편에서는 치안의 의미에서 안전성(테러리즘, 범죄, 형벌 등)의 문제이고, 다른 한편에서는 사회보장이라는 의미에서의 안전성의 문제이다. 사회보장을 둘러싼 문제는 사람들의 최저한의 생존을 보장한다는 전후(戰後)부흥기의 과제가 끝나고 욕구가 복수화ㆍ개별화하는 시대에 따라가지 못하는 데에 있다. 83년 출간된 서적에  실린 CFDT 간부와의 인터뷰에서 푸코는 이러한 욕구를 둘러싼 배제와 포섭의 문제가 있다고 지적한다. 그렇다고 구체적인 사례를 상세하게 검토해야 할 필요는 없다. 오히려 푸코에게 사회보장에 늘 따라다니는 이 문제는 사람들의 자율에 대한 갈구와 관련된다.

  “의심 없는 적극적인 요구가 존재합니다. 그것은 각자에게 현실의 자율을 보장하면서 자기 자신과 환경 사이의 더욱 풍부하고 많고 다양하며 유연한 관계에 길을 열어줄 보장에 대한 요구입니다.”

  존재로부터의 자율 혹은 독립이라는 표현이 사회정책의 논의에서 인용될 때에는 확실히 양의성을 띤다. 그 위에서 푸코는 제도 그 자체가 수요의 증대에 견디지 못하는 때가 올지도 모른다고 말한다. 예를 들어 환자들 중 일부는 보험적용제외라는 사태를 맞이하게 될 것이라고 주장하며 제도를 바꿀 때에 당사자 본인의 참가와 분권화의 프로세스를 거쳐야 한다고 주장한다. 구체적인 계획을 본인이 제시하는 것은 아니다. 호의적으로 말하면, 사회적인 안전성의 동요에 대해 무언가의 형태로 당사자의 결정권을 확대하여 쓰기 쉽도록 하는 것 외에는 방안이 없다고 생각하는 것 같다.

  한편 치안(안전성)에 관해서 푸코는 1977년의 앞서 인용했던 인터뷰에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안전한 사회—현재는 ‘안전’이라는 표현이 곧잘 사용된다—란 특정의 행위를 전면적으로 배제하는 것이 아니라 일정의 위험성을 인정한 하에서 그 존재를 허용하는 ‘약삭빠르고 교활한’ 성격을 구비하는 것이다. 그 의미에서 안전한 사회는 전면적인 억압을 기정사실화하는 전체주의사회와는 타입이 다르다. 그러나 반면 이 사회는 치안이나 안전을 보장하는 대가로 사람들에게 부담을 요구한다. 그 내용은 ‘파시즘이 아닌 무언가 새로운 것’일 수밖에 없다. 그것이 무엇인지를 확인할 것, 그리고 ‘무엇인지’를 비판적으로 검토할 것을 과제로 삼아야하지 않는가라고 푸코는 말한다. 이 ‘무엇인지’가 신자유주의형 통치와 관련된다는 것이 최근 몇 년간을 통해 분명하게 드러났다.

 

  3. 생산하는 주체의 생산-인적자본론의 인간학

  푸코는 신자유주의를 복지국가와 전체주의국가라는 두 가지에 대항하는 통치성으로서 파악했다. 양자와의 관계에서 말하면, 이것은 통치하지 않는 통치, 통치에 대항하는 통치로 말할 수 있다. 이와 동시에 『생명정치의 탄생』은 신자유주의 경제학에 인간학적인 측면이 있다는 것에 주목한다. 2014년 3월에 영면한 인적자본론의 주요이론가 게리 베커(Gary Becker)는 2012년 5월 근무지인 시카고 대학에서 푸코의 강의록 편집자의 한 사람이었던 법학자 베르나르 아르쿠르의 사회로 푸코의 조수이자 강의록편찬자인 프랑소와 에발도와 토론했다. 이 귀중한 자리에서 베커는 인적자본론에 관한 푸코의 논의에 대해 ‘동의하지 않는 바는 거의 없다’고 말하며 푸코의 논의가 중요한 포인트를 적확하게 집어내었다고 높이 평가했다. 그러나 푸코 자신은 베커의 논의를 요약하면서 한 논점에 대해 두 가지를 부가했다. 노동하는 개인이 경제 분석의 대상이 됨과 동시에 그 개인이 생산하는 주체가 되는 것. 당연히 베커 본인은 이 점이 신경 쓰였다.

  “푸코는 ‘게리 베커는 소비를 둘러싼 매우 흥미로운 이론을 제출했다’고 말했습니다. 실제로도 흥미로운 일이고요.(웃음)”

  푸코와 베커 이 두 사람이 관심을 가진 것은 인적자본론에서 개인의 모든 활동이 무엇인가를 만들어낸다는 것, 즉 생산으로서 파악된다는 점이다. 물론 인적자본이라는 사고방식 그 자체는 고전파 경제학에도 존재한다. 그러나 1950년대의 아메리카에 주류파 노동경제학을 혁신하는 존재로서 등장한 인적자본론은 노동자 한 사람 한 사람의 경제활동에 관심을 기울이고 개별적으로 다루고자 하는 점이 크게 다르다.

  인적자본론에서 노동자는 노동력을 판매하고 그 대가로서 자금을 취하는 존재가 아니다. 자발적인 존재와 떼어지지 않는 인적자본의 소유자이며, 그 자본주식에 의해 프로로서 소득을 취하는 존재이다. 이러한 노동자관은 경제학에 있어서 인간상의 큰 전환을 수반한다. 자유주의경제학이 모델로 하는 호모 에코노미쿠스(경제인)의 개인을 고전파 경제학에서는 교환ㆍ거래를 수행하는 ‘상인’에 빗댄다면, 신자유주의경제학에서는 그와 동일한 경제인을 ‘기업’으로 다룬다. 이 경제인은 자본을 이용하여 소득을 산출한다. 노동자는 같은 일을 한다 해도, 지역과 년대에 따라 수입이 다르다. 이 보편적인 사실이 노동자 한 사람 한 사람의 인적자본의 구성이 다르다는 관점에서 잘 설명된다는 것이 인적자본론의 주장이다. 베커는 이 자발적인 관점을 ‘인간중심의 경제학’이라고 부르는데, 맥락적으로는 기업형 경제인의 행동을 중심으로 하는 경제학이라는 의미에서 이해될 수 있다.

  그러나 그와 동시에 이러한 관점의 전환은 온갖 주체를 ‘생산하는 주체’로 바꾸는 조작을 포함한다. 이것이 베커의 소비이론을 흥미롭게 다뤘던 푸코의 관점이다. 푸코는 베커 자신의 논의를 인용하면서 이렇게 말하고 있다.

  “소비하는 인간은 소비하는 한에서 생산자입니다. 그렇다면 그는 어떻게 무엇인가를 생산할까요? 그가 생산하는 것은 자기 자신의 만족에 다름 아닙니다. 또 소비를 기업 활동에 가까운 것으로 간주하지 않으면 안됩니다. 그러한 기업 활동으로서의 소비에 의해, 개인은 자신이 자유로워질 수 있는 어떤 자본으로부터 출발하면서 자발적인 만족으로 간주되는 무엇인가를 생산합니다.”

  혹은 개인은 ‘투자가’가 된다. 부모가 양육에 할애하는 시간은 아이의 인적자본의 충실을 기하기 위한 투자이며 이주는 지위나 보수의 개선을 위한 투자로 이해된다. 이 의미에서 인적자본론의 세계에서는 노동자나 소비자를 생각할 필요는 없다. 계급이나 착취도 없다. 마이크로한 레벨에서 보면, 인적자본의 개량을 위해 투자가 행해지며 그 인적자본을 활용하여 소득을 산출하는 생산자=기업으로서의 개인만이 존재할 뿐이다. 또 정책레벨에서는 그러한 개인=기업가가 갖는 인적자본에의 충실한 투자만이 이노베이션(innovation)이나 경제성장을 뒷받침하는 원동력이라는 원칙이 제시된다.

  이와 같이 인적자본론의 주장을 견실하게 파고드는 푸코의 흥미는 정치적이며 인간학적인 것이다. 실천적인 측면에 강한 경제사상에서 기업으로서의 개인, 생산하는 주체라는 인식론적인 틀이 만들어지기 때문이다. 확실히 인적자본론이 의도하는 것은 노동자 자신을 경제 분석의 중심으로 조직하는 것, 개개의 노동자에 의한 노동을 합리적인 경제활동으로 파악하는 것을 중심적인 과제로 삼는 것이다. 푸코는 인적자본론과 고전파경제학, 마르크스주의 사이에서 노동을 둘러싼 입장차를 다음과 같이 정리한다.

  “가능한 것, 그것은 결코 현실의 자본주의가 노동의 현실을 추상화한다는 마르크스주의의 이른바 현실주의적 비판을 계승하는 것이 아니다. 그런 것이 아니라 경제학의 언설에서 노동자를 추상화하는 방식에 대해 이론적 비판을 행하지 않으면 안된다. 그리고.. 라고 신자유주의자는 말합니다. 경제학자가 노동을 이 정도로 추상적으로 다뤄왔던 것은 [중략] 고전파경제학자가 경제학의 대상을 자본, 투자, 기계, 생산물 등에서 이뤄지는 프로세스로밖에 볼 수 없기 때문이라고.”

  여기서 말하는 노동의 현실의 추상화란 노동이 균일한 시간이라는 요소로 전환되는 것을 가리킨다. 그러나 그것은 현실의 자본주의가 노동의 리얼리티를 그와 같은 것으로 ‘현실적으로’ 바꾸어버렸기 때문이 아니라 고전파경제학이론이 그와 같은 추상화의 조작을 ‘이론적으로’ 행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문제는 마르크스형의 자본주의 비판과는 반대로 현실을 바꾸는 것이 아니라 현실의 시각을 바꾸는 것이 된다. 따라서 노동에 관한 이론을 만들어내며 그것을 자본주의 중심으로 다룰 필요가 있다는 것이 신자유주의 경제학자의 생각이며, 그것이 인간에 관한 새로운 시각과 통한다고 푸코는 이해한다. 신자유주의자는 로빈스에 의한 경제학에 관한 중요한 정의—경제학이란 목적과 선택적 용도를 구비하는, 희소수단과의 관계방식으로서 인간행동을 연구하는 과학이다—를 ‘이용’했다고 푸코가 말한 것은 이 의미에서일 것이다.

  나아가 생산하는 주체의 생산, 기업=주체로서의 경제인이라는 도식은 단순한 이념형에 불과한 것이 아니라고 푸코는 생각했다. 인적자본론의 정치적인 요소와 함의는 쉽게 상상할 수 있지만 그것을 빼버리면 이야기는 끝나지 않는다. ‘그러한 정치적 함의의 심각함과 밀도 혹은 그것이 불러오는 위협의 요인이 지금 이야기하는 프로세스의 수준에서 행하는 분석과 프로그램의 유효성 그 자체에 어느 만큼이나 차지하는가를 제시해야 하기’ 때문이다. 즉 경제현상의 분석이 활용하는 인간상이 사회현상 일반의 분석으로 확대됨으로써 사회적인 것과 경제적인 것과의 관계를 역전하고 경제적인 것이 다시금 우위에 서는 사태가 발생하는 것을 다뤄야한다는 것이 푸코의 주장이다. 달리 말하면, 앞서 논한 매크로한 레벨에서의 안전성의 통치와 마이크로한 레벨에서의 생산하는 주체에 대한 인간학이 맞물리는 것에서 신자유주의형 통치가 성립한다. 이 점이 바로 푸코가 새로운 통치의 존재방식으로서 신자유주의에, 그리고 그 퍼스펙티브에 기반한 논의의 토대가 되는 인적자본론의 인간상에 강한 관심을 보여준 근거이다.

  그런데 온갖 통치실천은 그 무엇의 ‘진리’와의 관계에서 행해진다고 푸코는 생각했다. 신자유주의형 통치에서 진리란 ‘시장’이다. 그러나 그것은 통치가 자유방임이라는 접근을 통해 존중해야하는 지표가 아니다. ‘통치의 자기제한의 원리가 아니라 통치에 대항하기 위한 원리’로서 다루고 있는 것이다. 시장이란 국가에 의한 통치가 언제라도 과도할 수 있는 가능성을 전제로 하면서 그것을 감시하며 법적으로 제어하는 구조임과 동시에 그 기준으로 기능하는 것이다.

 

  4. 통치의 분열[失調]과 도전하는 주체

  생활면에서 국가에 의한 보호의 전망이 흔들리는 한편, 항상 교활하며 때때로 폭력적인 수단에 의해 사회는 통치된다. 푸코가 논한 1970년대 후반에서 80년대 초반에 관한 안전성(치안, 안전, 사회보장)의 위기의 시대에는 이러한 측면이 있었다고 생각한다. 푸코는 그러한 위기에의 응답으로서 부담의 거부라는 전략을 제시한다. 앞서 들었던 77년의 인터뷰에서 ‘권력의 새로운 존재방식을 해명하는 것이란 안전성(치안, 안전)의 대가로서 짊어질 새로운 속박을 거부하고 그로부터 생겨나는 새로운 이권을 공개적으로 요구하는 것인가’ 라는 어느 질문에 푸코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바로 그것입니다. 사람들이 안전성의 시스템에서 거리를 두고 대가를 지불하고 싶지 않다고 생각하는 지점을 분명히 밝히는 것입니다. 사실 지불할 필요가 없습니다. 사람들을 편취해서는 안된다는 것입니다.”

  국가의 통치전략을 거부하고 부질없는 요구에는 따르지 않겠다고 공언하면서 협상을 벌이는 것이다. 이것이 통치당하는 측의 하나의 전략이라는 것이 푸코적인 논의이다. 국가에 의한 통치=통솔에 대해 이끌리는 방향과 그 존재방식에 변신을 요구하는 것이다.

  그런데 국가에 의한 통치가 이제 와서 국민을 어떻게 이끌어야 하는지 잘 모르겠다고 당당하게 인정하는 경우에도 이러한 접근이 여전히 유효할까? 서두에 인용했던 『일본재흥전략』개정 2014—미래에의 도전의 한 구절을 다시 한 번 살펴보자.

  “경영자를 비롯하여 국민 한 사람 한 사람이 ‘활기에 찬 일본의 부활’을 위해 신진대사의 촉진과 이노베이션(innovation)에 맞서는 ‘도전하는 마음’을 회복하고, 국가는 이를 서포트함으로써 ‘세계에 으뜸가는 비즈니스 환경’을 정비한다.”

  물론 여기서는 시장경쟁을 성립시키기 위한 환경의 정비가 통치의 역할이라는 신자유주의 통치의 기본적인 이념이 존재한다. 그러나 그와 동시에 이제 제도적인 틀을 준비하기에는 글렀다는 체념도 보이는 것 같다. 표제의 ‘도전’이라는 단어에 관해서도 일본경제전체가 안고 있는 과제와 국민 한 사람 한 사람의 과제를 동격으로 논할 수 없음에도 불구하고, 한 사람 한 사람이 ‘도전하는 마음’을 회복하는 것이 마치 일본경제부활의 열쇠인양 묘사되고 있다. 이노베이션(innovation)의 잠재적인 주역인 기업가와 고도인재가 되는 이들은 한줌에 불과하다. 그와 같은 ‘도전’을 ‘국민 한 사람 한 사람’에게 호소한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다. 동원의 윤리조차 될 수 없다. 푸코에 의하면, 시장이 효율적으로 기능하는 것을 목적으로 해서 시장외의 제도=환경에 적극적으로 개입하는 것이 신자유주의형 통치에 특징적인 수단이다. 그러나 위의 텍스트에서 통치하는 측이 어떻게 환경을 정비할 수 있을까, 그 과정이 보이지 않는다는 인상을 받는다.

  푸코가 태어난 시대보다도 통치의 위기가 심화된 속에서 자모라와 같은 푸코 비판이 나오는 것 자체는 이해할 수 있다. 신자유주의적인 개혁과 재정(財政)소멸에 의해 복지국가의 기반 그 자체가 여기저기서 무너지는 이때에 푸코와 같은 신자유주의론이 그것을 후원하는 것이 아닌가? 그러나 본고에서 검토한 안전성과 인적자본에 관한 논의가 말해주는 것처럼, 푸코에게 현재는 어떠한 의미에서는 위기이며 전환기임을 확인해야 할 중요한 시점이다. 푸코의 논의로 말하면 통치에 의한 통솔이 혼란스러울 때야말로 통치당하는 측에서는 자율을 요구할 가능성, 자신을 스스로 다양하게 이끌 가능성이 높아진다. 예를 들어 서두에서 인용했던 페미니스트 베아트리스 프레시아도(Beatriz Preciado)의 텍스트 ‘우리들은 <혁명>을 말한다’의 한 구절에 대해 자모라는 인터뷰에서 자유지상주의적 좌익의 전형으로 비판하지만, 프레시아도는 오히려 복지국가의 기능부전이라는 상황을 푸코가 말한 의미에서의 ‘위기’로 포착하며 거기에서 새로운 공동성과 조직화의 가능성을 찾아내고 있다.

  서두에서 소개한 논의로 다시 돌아가 보자. 그 일이 있은 며칠 후 개발도상국에서 저널리즘과 UN 기관에서 활동한 경험이 있는 게스트 강사의 이야기를 토대로 행해진 그룹발표에서 어떤 그룹은 일의 리스크가 무서운 것인가라는 논점을 제출했다. 리스크란 가능성의 진폭이기 때문에 결과가 부정적이라 해도 독창적인 관점을 만들어내는 데 도움을 줄 수 있다는 논의로 발전했다. 토론이 끝난 후의 감상문에는, 정세[政情]가 불안한 곳에서 일한 경험을 간접적으로 접했을 때 재미있다고 생각했지 두렵지는 않았다는 소감이 많았다. 그러한 ‘재미’에는 사물을 비판적으로 다루는 지성인이 되고자 하는 욕구가 있을 것이다. 그들에게는 아마도 두 가지의 다른 ‘도전하는’ 주체가 동거하고 있을 것이다. 정부가 말하는 의미에서의 ‘도전’에 잘 들어맞는 인텔리전스(능력)의 강화로 나아가는 것. ‘도전’의 의미를 다르게 이해하고 “능력을 넘어서는” 인털렉트(지성)를 요구하는 방향으로 나아가는 것. 그러나 후자로 가기는 쉽지 않을 것이다. 다만 한 가지 말할 수 있는 것은 통치의 틀이 벗겨지는 시대에서 미래가 두려워도 어쩔 도리가 없다는 감각이 분명히 존재한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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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藤田省三著作集4』에 실린 또 하나의 논문. 앞서 번역한 후지타의 논문과 비교해서 좀더 분명하게 후쿠자와 유키치에 대한 그의 평가가 집약되어 있다.  

※ 아래 두 장의 사진의 출처는 2009년 게이오의숙 창립 150주년 기념 일본 국내 순회 전시한 福沢諭吉展의 도록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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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維新における福沢の選択」[유신에서 후쿠자와의 선택]

후지타 쇼우조우(藤田省三)

 

  막부 말기 전국적인 환란의 한복판에서 단 한 곳, 마치 에도시대의 "데지마"(出島)[각주:1]처럼 후쿠자와의 학원[塾]만이 '책을 읽는' 문명을 논한 것은 도대체 무엇때문이란 말인가? 그들이 창 밖의 도막(倒幕)의 싸움의 총성소리를 들으며 '원서'를 읽었다는 사실은 널리 알려진 바이다. 어쩌면 게이오의숙 사람들이 그것만이 이 나라의 명예로운 전통이라고 스스로 되새겨온 것인지도 모른다. 아니 게이오 사람들뿐만 아니라 나 같은 이도 그것을 어느 때는 지침으로, 또 어느 때는 자숙의 기준으로 삼아온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후쿠자와가 그렇게 한 이유 혹은 동기에 대해서는 그 '사실'을 '전통'으로 자부할 때에도, 또 그것을 '교육'으로 받아들일 때에도, 의외로 언급되지는 않는 것 같다. 가령 그 점이 언급된다 해도 극히 단순히 후쿠자와는 '공부를 좋아했다'거나 '정치를 싫어했다'라는 성향으로 환원되고, 그도 아니면 '학자의 본분'의 모델을 제시하고자 했던 후쿠자와의 교육자적 관심만을 그 동기로 치부한 경우도 많다.

  위의 경우에 후쿠자와의 행동은 일본전래의 예의 '미담'의 하나로 이야기되고, 그때에는 '학도'의 정치적 혹은 사회적 비판이 봉쇄되는 경향마저 있다. 물론 후쿠자와는 전대미문의 '공부를 좋아한' 사람이며 매우 '정치를 싫어하는' 부류에 속했다. 또 일본에서 최초로 '학자'(오늘날로 말하면 인텔리겐차)의 고유한 '직분'(Beruf)이 무엇인지에 대해서도 가르친 사람이다. 

  그런데 후쿠자와가 유신도막(維新倒幕)의 전쟁의 한가운데에서 탄환이 날아다니고 백도(白刀)가 춤을 추는 에도의 거리에서 감히 한가롭게 공부에 전념했던 것은 위와 같은 이유뿐만이 아니다. 그 이전부터 그는 '막부는 망해야 한다'고 생각했고 그것을 친구들에게도 말하고 다녔다. 또한 그는 번(藩)에 대해서도 '안중에 없는 번'이라고 생각했다. 

  그가 '부모의 원수'처럼 생각했던 막번 체제가 쓰러질 것 같은 그 순간에 모셔두었던 칼을 휘두를 법도 했지만 반대로 가지고 있는 칼을 구태여 팔아버리고, 부랑, 난폭, 암살이 횡행하는 격란의 에도의 시내에서 일부러 무장하지 않은 단정한 모습으로 지내며 오로지 공부에만 전념한 데에는, 분명 '좋아함'이나 '가르침'을 넘어선 깊은 생각이 자리하고 있었을 것이다. 그 외에 남다른 이유가 있었던 것은 아니다. 지극히 명료한 원리의 문제였다. 후쿠자와는 누구에게도 한발짝도 양보할 수 없는 자신의 원칙을 가지고 모두가 무장한 상황에서 무장하지 않은 단 한 사람이 느낄만한 공포를 억누르고 무장하지 않았다. 그리하여 그는 그와 같은 원칙에서 눈 앞에서 벌어지는 도막전쟁(倒幕戰爭)의 쌍방의 '주역'에게 '냉담함'을 요구했던 것이다. 바꿔 말하면, 후쿠자와는 그의 원리에 입각해서 유신의 적극적 구상을 만들어내고자 했으며, 저 특정한 상황에서 저 특수한 모습으로 전개되는 전투에 참가를 거부했던 것이다. 이것이 온갖 내전 일반을 싸잡아 부정해버리는 것이 아니라면, 그것은 물론 정치적 무관심을 긍정하는 것도 아니다.

  반대로 확고한 보편적 원리와 함께 예리하며 거대한 정치적 리얼리즘이 그의 판단의 기저를 관통하고 있었다. 그러하기에, 도막전투의 시기 그의 '미행'[美擧]을 본받는다는 핑계로 '학자'로서 정치사회적 비판을 억제하려는 사람들이 만약 있었다면, 그것은 오히려 후쿠자와의 원리적 태도(정신)를 심히 왜곡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그리하여 후쿠자와로 하여금 단연코 '비무장'과 '불개입'을 결심케 했던 것과 동일한 원칙이 그에게 오로지 '원서'를 읽히게 했던 것이다. 

  그 원리·원칙은 무엇인가? 내가 '보물찾기'와 같이 그 '발견의 장면'을 짓궂게 미루고 있는 것은 다른 이유가 있어서가 아니다. 말하자면, 지금에서는 다 알려진 그의 원칙이 지극히 당연한 것으로 여겨지지만, 그 때문에 오히려 저 유신의 상황에서 그의 원칙이 어떻게 관련되며 어떠한 행동과 어떠한 정신상태를 그에게 요구했는가 라는 핵심이 인상적으로 전달되지 못할까, 그것이 염려스럽기 때문이다.

  즉, 그 원칙이란 '문명'의 정신을 일본에 배양하여 확대하는 것, 바로 이것이다. '쇄국' 체제를 부수고 '개국' 체제를 모색하는 것이 그 원칙의 첫 번째 귀결(corollary)이다. 그리하여 후쿠자와의 입장에서는 막부말기의 '무력투쟁'에서 당사자 쌍방은 모두 비판받아야 했다. 왜냐하면 "사바쿠"(幕: 도쿠가와 막부 말기 막부의 편에 들어준 당파)든 '근왕'(勤王)이든 누구 할나 것 없이 '양이(攘夷)·쇄국주의자'의 무리라고 보았기 때문이다. 그렇게 "쵸닌"(人: 도시에 사는 상인과 장인)과 그 밖의 '하등사회'의 대부분의 사람들을 제외하고, 전국의 "사무라이"라는 무사신분에 발 들여놓은 무리들은 "사바쿠"든 '근왕'이든 "술에 취한 듯이" 광기에 가득 찼다. 그 열광은 지적인 감동이 아니었다. 양쪽 다 '양이'(攘夷) 혹은 "사바쿠"라는 한 지점에 집착했을 뿐이다.

  막부는 종종 '개국'을 하는 것 같았고, 또 지난 후에 보면 '개국'을 하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그 내실을 아는 후쿠자와에게는 '천하제일의 양이번(攘夷藩)'으로밖에 보이지 않았다. 카츠 야스요시(勝安芳)[각주:2]조차 전력을 다해 '포대'(砲臺)를 만들었던 것처럼 보였다. 막부는 얼마간 '개국'파의 외견을 띠었고 나아가 다소 '개국'적 행동을 보여주었지만, 그것은 막부가 대외교섭에 맞닥뜨렸던 것에 다름 아니다. 그 대외교섭이란 것은 군함 '흑선'과 그 포성에 의해 외부로부터 강제되었던 것이 아니던가. 즉 막부의 '개국'적 양상은 자기의 내적원리와는 어떤 관계도 없는 단순한 외적 반응에 지나지 않는다.

  우리들은 여기서 백년 전의 '일본정치'의 역사적 모습의 정신적 모양새를 비추어볼 수 있지 않을까? 지금도 이 나라는 군사적으로는 강제되지 않는 나라와는 국교를 맺지 않는다. 백년 전도 지금과 같았다. 막부는 가능하다면 쇄국을 하고 싶었다. 그것이 그들의 존립근거였기 때문이다. '양학자'(洋學者)라고 해도 그 상당수는 '양이'(攘夷)의 도구나 마찬가지였다. '근왕'파에 대해서는 말할 필요도 없다. 양 파벌은 이렇게 '우락부락한' 어깨를 들먹이며 쇄국과 양이라는 막부 원리를 위해 맹렬한 싸움을 전개했던 것이다. 

  그 결과가 막부의 붕괴였는데, 그들의 눈에는 이것이 보이지 않았다. 그렇다면 그들 중에 막부의 붕괴 하에서, '문명'을 밀고간 '민권'을 확대하며 '국민'을 형성한 담당자가 있었는가? 없었다. '도막근왕파'가 만약 그 담당자였다면, 후쿠자와는 흔쾌히 그에 가담했을지도 모른다. 불행 중 다행인 것이 후쿠자와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다. 그들 '폭력파'가 정치를 해야한다면 "도저히 이 나라는 세워질 수 없다"고 생각했다. 

  물론 후쿠자와도 도막의 주요한 원동력의 하나가 '근왕파'의 일군이라고는 생각했다. 그러나 그들에게 인류의 '문명'의 진보에 조금이라도 기여할 새로운 과제를 이끌어갈 힘이 있으리라고는 전혀 생각하지 않았다. 그들에게는 역사의 전환기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기 위한 지적 능력이 있었을 리 만무하다. 그 점에 대해서는 오히려 그 반대의 가능성이 훨씬 강했다. 사실 유신 후의 수다한 사례가 후쿠자와의 판단을 실증한다. 

  그리하여 후쿠자와의 학원만이 스스로를 위험에 노출시키면서 일부러 무장하지 않았고, 그럼으로써 그들은 스스로 선택한 의미와 경계를 내외적으로 드러냈다. 그리고 음산한 상황 하에서 단 한 사람만이 쾌활한 태도로 '문명'의 미래를 전망하며 그 신화의 습득과 구체화의 준비에 몰두했다. 그 성과는 드디어 '메이지'에 입성함과 동시에 사회공헌으로 출현했다. 만약 메이지 유신에 '문명'을 원리적으로 추진한 사회적 변혁의 측면이 있다고 한다면, 그 유신변혁에서 최고의 '유신'적 측면은 후쿠자와에게서 상당부분 발견될 수 있다고 말할 수밖에 없다. 이 역사의 한 꼭지, 즉 유신에서의 후쿠자와의 선택과 후쿠자와에서의 유신의 실현, 이 둘의 역설적인 결합은 작금의 우리에게 무엇을 가르치고 있는 것인가?

 

  1. "데지마"(出島) 1634년 에도막부의 쇄국정책의 일환으로서 나가사키에 축조된 인공섬으로, 1641년부터 1859년까지 네달란드와의 교역이 행해졌다. 1922년 사적으로 지정되었다. (일본위키피디아) [본문으로]
  2. 1823-1899. 막부 말기부터 메이지 초기의 정치가. 사무라이.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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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류학과 철학

번역글 2015. 1. 28. 02:24

『現代思想』2015년 1월호에 실린 프랑스의 구조주의 인류학자 필립 데스콜라의 글을 번역했다. 필립 데스콜라는 레비스트로스의 제자이며, 2014년 지구환경의 문제해결에 기여한 이에게 주는 '코스모스국제상'을 수상했다. 이 논문은 그가 지난 2014년 10월 일본에서 열린 <자연에 관한 인류학: 필립 데스콜라의 저작을 중심으로>라는 토론회에 참석했을 때의 발표문이다.

※ 본 글은 불어의 일본어역의 한국어역이다. 일본어역자 야타베 카즈히코(矢田部和彦)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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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류학과 철학(Anthropologie et philosophie)

필립 데스콜라(Philippe Descola)

 

  "아마존과 구조주의는 '잘' 맞는다. 왜냐하면 현지인들이 일상에서 구조주의적으로 생각하기 때문에"라고 수년전에 쓴 적이 있습니다. 이 글을 썼을 때 제가 생각한 것은--지금도 이 생각에는 변함이 없습니다-- 다음과 같습니다. 사물의 구체적인 성질에서 추상적인 관계를 끌어내는 경향이 있는 아메리카 대륙의 선주민의 사상, 특히 사상(事象)의 표면에서 이차적 특징을 추출하여 틀지움으로써 관계의 복잡한 구성도를 그려내는 그들의 능력은 구조분석의 특질과 겹치지 않는가? 그래서 이러한 사유 경향을 레비스트로스가 브라질의 민족지학적 체험을 통해 구조인류학의 영감의 원천으로 삼은 것이 아닌가? 는 가설을 세워보았습니다. 구조론적 방법의 성질이 그 방법의 적응대상 자체의 성질과 합치한다는 나의 아이디어에 레비스트로스는 "자네, 이번엔 조금 지나친 것 같은데"라고 말했습니다. 오늘은 이 응답에서 시작된 사유에 대해 생각해보고자 합니다.  

  레비스트로스의 지적이 상기하는 물음은 대략 다음과 같은 것입니다. 원주민의 사상을 인류학자가 분석하여 보고할 때, 수집한 정보(이것은 다양한 언표와 행위이며 여기저기 흩어져 있는 경우가 많습니다), 관찰대상의 발화·행위의 스타일과 인류학자 자신에게 친숙한 개념화의 표식 사이에서 감지되거나 예감되는 친화성, 그리고 인류학자가 의거하는 다양한 명제의 재귀성의 정도 등의 요소를 고려해야 합니다. 그런데 각각의 요소는 [민족지학에서] 도대체 어떤 역할을 할까요? '원주민의 사상'이라는 기묘한 용어에 담긴, 나중에 좀 더 자세히 살펴보겠지만 지금은 우선, 인류학의 언설이 개념화를 행할 때의 몇 가지 특질에 관해 서술해보고자 합니다.

  프랑스에서는 다른 나라와 달리 인류학자의 상당수가 철학교사로서의 훈련을 받는 만큼 이 문제는 절실한 문제입니다. '철학어'로 말하는 것이 우리들에게는 극히 자연스럽기 때문입니다. 이를테면, 인류학자의 길을 가려는 상당수의 사람들은 대학에서 행해지는 철학--대학철학의 주요한 관심은 철학사의 주석이고, 이에 따라 스스로 용어를 이해하려 하지 않으며 외부 세계에서 제기되는 다양한 질문에 무관심한 사고--에 환멸을 느껴 인류학자의 길을 결정하는 경우가 많은데, 그러면서도 그와 같은 언어를 사용합니다.  

  타문명이 가르쳐 주는 추상적인 사고의 형태와 비교해서 철학의 독자성은 다음에 있습니다. 철학의 오리지널리티는 철학이 선취한 대상에 있다기보다 (아마 신을 제외하고) 어디에도 존재하지 않는 형태로 조합되는 요소의 총체로서 특징지어집니다. 철학은 재귀적이고 새로운 개념을 창조하면서 보편을 표방합니다. 물론 인간의 존재에 의미를 부여하는 사고 시스템은 어느 모로 보나 독창적인 사고(idea)를 발명합니다. 그렇지만 자기자신을 사유 조사의 대상으로 삼는 사고시스템은 극히 적습니다. 그리고 자신을 설명해내는 절대적인 유효성을 감히 과학이라고 주장하는 시스템은 철학뿐입니다. 그 주장이 역언법(逆言法 paraleipsis)을 활용한다 해도 그렇습니다. 그러나 이 주장은 당치않은 것으로 실제로 철학이 언급하는 여러 개념들은 그것들이 가리키는 여러 현실--자연, 주체, 존재, 초월, 역사--과 마찬가지로 타 존재론에서는 존재하지 않거나  존재론이 파악하려는 여러 현실을 소화할 수 없거나 중 하나에 지나지 않습니다. 의 귀추는 명백합니다. 다른 사고형태를 끌어들여야 하는 철학이 자신의 전제사항을 철저하게 재검토하든지(철학사에 비추어 보면 이것은 일부의 마이너리티만이 할 수 있는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인류학의 대칭화의 작업을 수용하든지,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이 두 가지밖에 없습니다. 이와 같은 작업에는 여러 부가적인 작업이 따라붙는데, 대략 1세기 전부터 인류학이 걸어왔던 길이 그런 길이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중에 이야기할 여러가지 이유로 인해 이 대칭화의 작업은 미완으로 남을 운명에 있습니다. 이 작업의 최종적인 형태는 수용자인 청중과 독자에 의해 규정되기 때문입니다. 인류학의 전문가, 그리고 2500년간 유럽 철학이 배양한 재귀적 사고의 애호가들. 그들이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은 단어로 말해야 할 필요성이 어떻게 해도 생깁니다. 이 불완전한 대칭화는 로컬의 이데올로기에서 분석자의 이데올로기로의 이행의 타입 혹은 양태에 따라 매우 다른 형태를 취합니다. 크게 나누어 세 타입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일반적으로 좀더 오래된 패턴으로는, 로컬(local)의 제도의 개념적 연계를 발전시켜 개념의 수비범위를, 제도의 원초적 형태와 제도에 의해 구체적으로 묘사되는 지역의 여러 특성을 넘어서게 하는 방식입니다. 인류학 초기에는 이 일반화로의 움직임은 상호 관련 없는 잡다한 현상을 조합하여 원주민의 개념의 의미를 확장시키는 형태를 취했습니다. 이러한 현상의 공통점이라고 하면, 개념이 상정하는 실천 영역에 관한 서구적 이해의 틀과 맞지 않는다는 점뿐입니다. '토템', '마나', '터부', '샤먼' 등이 이렇게 해서 만들어졌습니다.  

  좀더 가까운 시대를 살펴보면, 일반화는 오히려 제도, 프로세스, 관계의 존재양식 또는 민족지학적 관찰에 의해 추출되는 인식론적 경향 등의 개념적 귀결을 강화시키는 방법으로 기획되었습니다. 애매한 의미를 무제한으로 확장시킴으로써 치밀하게 정의되던 의미를 파헤쳐보는 방식을 구하는 것입니다. 루이 뒤몽(Louis Dumont)의 계급적 포섭(englobement hierarchique), 메릴린 스트래선(Marylin Strathern)의 객관화 과정과 탈객관화 과정 간의 왕래, 에두아르도 비베이로스 데 카스트로(Eduardo Viveiros de Castro)의 퍼스펙티비즘 등 어느 특정한 문화권이 처음부터 가진 특유의 성향의 파악을 목적으로 하는 이론의 구축이 그 전형적인 예로 볼 수 있습니다. 패러다임화하는 로컬 모델의 독자성과 모델의 구성원리 이 둘 모두는 처음에는 대비, 대조의 형태로 등장했습니다. 여기서 말하는 대비란 로컬 모델이 분석하고자 하는 현상의 범위와, 그 범위에 대해 서구 자신이 인식과 개념화를 추진해왔던 방법과의 대조를 의미합니다. 예를 들어 프레이저의 토테미즘은 인간과 비인간을 나누는 사유방식과, 뒤몽의 위계(hierarchique)는 소유적 개인주의와, 모스의 하우는 상업의 원리와 각각 대조를 이룹니다. 이것은 상대의 일반화가 일반원리를 상대화하는 것입니다. 

  다음으로 두 번째의 대칭화의 패턴을 살펴봅시다. 이 형태에서는 철학이론과의 유사성(적어도 논술 차원에서의 유사성)을 염두에 둘 만큼의 체계화된 코퍼스(corpus 集成)로 현지의 사고를 변환하는 작업이 행해집니다. 이와 같은 경향은 비교적 오래전부터 나타난 첫번째 패턴보다 더 오래되었다고 말해지기도 합니다. 우선은 선교[傳道] 인류학의 특징에서 이것을 찾아볼 수 있습니다. 그 최초의 예로는 베르나디노 데 사하긴(Bernadino de Sahaguin)이 나와틀어(nahuatl語)[각주:1]로 편찬한 『새로운 스페인의 사정에 대한 통사(Historia general de las cosas de la Nueva Espania)』를 들 수 있습니다. 라이프니츠의 사상에 영향을 주었다는 점에서 중국 예수회의 『예수회Ⅰ 중국서간집(Les letters edifiantes et curieuses)』은 가장 유명한 사례가 될 것입니다. 이 형태의 보다 근대적인 표현으로는 중앙아메리카 출신의 철학자들 사이에서 광범위하게 논의된 프라시도 템페르(Placide Tempels) 교부에 의한 예의 '반투의 철학'(Philosophie bantoue)이 있습니다. 

  대체철학에 대한 논의는 특히 아프리카에서 격렬하게 진행되었는데, 이와 같은 문제제기가 민족학 연구에는 전혀 나타나지 않았는가 라고 하면 그렇지는 않습니다. 그것은 보통 연구대상이 되는 사회의 도덕적·인식론적 양태를 민족학자가 묘사할 때 채용하는 철학으로서 철학적 색채를 띠는 형태로 뚜렷이 나타납니다. 프랑스의 경우, 일일이 셀 수 없을 만큼 많은 예가 있습니다. 필드워크를 행했던 민족학자의 제1세대의 철학이, 특히 후설의 현상학의 영향을 강하게 받은 것이 그 이유입니다. 그 영향은 모리스 리나르도(Maurice Leenhardt)의 경우와 같이 직접적이기도 했고, 마르셀 그리오르(Marcel Griaule)의 경우와 같이 간접적이기도 했습니다. 결과적으로 민족지학자는 자국에서 멀리 떨어진 곳에서 발견한 지(知)의 형태·존재형태를 관통하는 인식론적 패러다임을, 지배적인 인지적 리얼리즘에 저항하는 형태로 제기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도 얼터너티브한 형이상학을 소개함으로써 우리의 철학작법에의 파괴적 영향의 추산을 행하는 시도는 아직까지 드뭅니다. 이러한 시도에 도전한 이들은 서구철학을 배운 현지 저술가들 혹은 철학서의 논술규범에 따라 원주민의 사상의 가르침을 받아들인 서구의 인류학자들이었는데, 이들 모두는 원주민 사상의 원천으로 기능하는 다양한 제언(題言)을 실제로 사용·언표할 때 프래그머틱한 환경을 마구 휘젓는 주해의 영역에 머물 수밖에 없는 난점에서 벗어나지 못했습니다. 폴랭 웅통지(Paulin Hountondji)가 아프리카의 민족철학에 대해 '유럽인의 지적이고 세밀한 유희의 단순한 구실'이라고 말한 것은 지나친 감이 있지만, 이때의 대칭화가 아직 불완전했다는 것을 인정할 수밖에 없습니다.

  대칭화의 세 번째 패턴은 로컬의 원리의 일반화를 겨냥하는 것이 아니라면 원주민의 사상으로부터 철학적인 반-모델(counter-model)의 제시를 꾀하는 것도 아니라는 점에 있습니다. 이 의도는 여러 요소를 대립시키는 시스템 상의 차이를 조망함으로써 어떤 현상군에 있는 모든 상태(etats)를 파악할 수 있는 조합적 틀의 구축에 있습니다. 구조분석의 기초적 원리에도 있는 것인데, 그렇다면 왜 이와 같은 방법을 대칭화라고 불러야 하는가? 구조주의의 원리에서 보면, 전체화(totalisation)는 이미 준비된 여건이 결코 아닙니다. 인류학자가 자신의 절대적인 시선에서 세계를 구조화하여 얻을 수 있는 시야에는 [전체화가] 기능하지 않습니다. 따라서 전체화는 어떤 문화의 다양한 특징, 규범, 제도, 신분 등을 상호의 바리에이션·변이형(變異形)으로 만들어가자는, 끝나지 않는 작업의 결과로 얻어지는 것으로 보충하고자 합니다. 이러한 것들의 변형은 집합체(ensemble)에 속하는데, 그 집합체 자체는 다른 요소가 끼어들면 별도의 방식으로 재구성할 수 있으며 나아가 다양한 변형이 반복확장하는 무대로서 변형을 포섭하는 것 외에는 그 존재 의의가 없다고도 말할 수 있습니다. 단적으로 말하면, 이와 같은 대칭화의 패턴은, 사람들이 이곳 저곳의 제 현상에서 찾아내는 다양한 특성에 전적으로 의존하게 하며 타 퍼스펙티브에 관해서는 관심 가는 대상의 다양성에 대한 다소의 지식을 요구하는 데에 머물고 맙니다. (지적 작업에 임할 때 최소한 이 정도는 하지요.)

  『자연과 문화를 넘어서(Par-dela nature et culture)』에서 제시한 실존적 전환(transformation ontologique)의 형태를 예로 들어보겠습니다. 여기서 문제가 되는 것은 식별모드를 쌍으로 대립시키는, 대조작업을 기본으로 하는 매트릭스입니다. 식별모드란 인간이 세계에 참여함으로써 환기하는 유사성과 대조(형상, 질량 혹은 태도에서의 대조)에 기초하여 인간과 그 주변의 사물과의 연속성·비연속성을 인식하는 감지(感知) 방식을 말합니다. 어떤 사물에 직면했을 때 그 사물이 나와 동일한 물질성과 내면성을 띠는 요소를 가지고 있다고 상정하고 나아가 그것들의 요소가 다른 인간과 다른 비인간이 공유하고 있는 요소와는 다른 것이라고 파악한다면, 이때의 식별모드를 토테미즘이라고 합니다. 물질성과 내면성은 나와 다르지만, 관계성은 가능하다고 느껴질 정도로 그 차이가 미미하다면, 아날로지즘(analogism). 내면성은 공통적인 반면 물질성은 다른 경우는 애니미즘. 반대로 내면성은 비교불가능한 반면 물질성이 비슷하다고 감지되는 경우는 내츄럴리즘. 이 존재론의 도표는 레비스트로스가 '질서의 질서'라고 부른 것--사회활동을 구성하는 다양한 시스템의 한 단계 위의 차원에 있는 구조적 조립물--과 유사한 측면이 있습니다. 그러나 여기에서 질서의 질서는 분석적으로 새롭게 상정하는 몇 개의 차원의 통합을 토대로 삼지 않습니다. 오히려 사물을 체험할 때에 제일의적으로 감지되는 것에 대한 가설(우리들을 에워싼 사물의 제 특성을 식별하고 그러한 특성을 가능하게 하는 관계를 그 특성으로부터 추론하는 작업), 그 가설의 결과로 떠오르는 질서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식별의 매트릭스에서 철학이 제일동자(第一動者)로서의 역할을 떠맡는 것은 아닙니다. 이 매트릭스는 일종의 실험장치이며 사상(事象)을 캐치하고(일으키고) 골라내어(조합하여) 차이의 통사법(統辭法)을 밝혀내기 위한 것입니다. 그러나 그뿐만이 아닙니다. 제가 이 장치를 채용한 것은 무엇보다도 구조분석의 기본원칙에 충실하고 싶기 때문이었습니다. 기본원칙에 준하면, 변이형은 다른 변이형에 대한 변형이며 특별한 지위를 부여받은 특정의 변이체에 대해서는 그렇지 않습니다. 저는 확실히 존재론적 관계의 매트릭스를 전면에 내세우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 매트릭스가 매트릭스의 차원에서 두드러지는 변이형(애니미즘, 내츄럴리즘, 토테미즘, 아날로지즘), 그리고 다른 시스템(사회학, 인식론, 신화론, 공간론의 차원)으로의 이행형으로서 단리(單離) 가능한 변이형, 그야 어떻든 다른 변이형의 상위에 서는 우위성이 부여되는 것은 아닙니다. 이 점은 사회적 문화적 사상(事象)을 이해하는 모델을 구축하는 작업에 착수함에 있어서 우리의 존재론의 전제사항에 대해 가능한한 중립적이고자 하는, 처음부터 자기자신에 부여한 조건입니다. 우리 서구인의 존재론, 즉 내츄럴리즘은 세계를 객체화하는 네 개의 변이형 중 하나에 지나지 않습니다. 그러나 그렇게 말한다 해도 구조적 조합은 다른 두 개의 대칭화의 패턴과 마찬가지로 불완전한 것임에는 변함이 없습니다. 불완전한 이유는 각기 다른데, 이 패턴의 불완전함은 이 패턴이 타자의 제도나 관습에 관한 일반적 지식을 필요로 하지만 이러한 지식이 서구만이 생산해왔던 부류의 지식이기 때문입니다. 그리하여 서구 특유의 지(知)의 생산기획에 의존할 수밖에 없습니다. 한 가지만 말씀드리자면, 서구에 특유한 것은 보편을 목적으로 하는 그 의도에 있지 않습니다. 모든 것을 설명하고자 하는 야망을 품고 있는 지(知)의 시스템은 세계 어디에서도 찾아낼 수 있습니다. 서구의 경우에 특징적인 것은 지(知)의 생산이 근거하는 경험적인 데이터에 전 세계를 망라하는 성격을 요구하는 데에 있습니다. 

  타자의 지를 대칭화하는 세 가지 패턴은 민족지학자가 보고 들은 이야기와 행위를 출발점으로 하여 각기 다른 타입의 갈림길을 상정합니다. 이른바 채권(債權)과 같이, 유무의 언급 없는 주해(注解)의 채굴, 개념의 일반화, 이행시스템으로의 통합 등 세 방향 중 어느 쪽으로든 나아갑니다. 여기서 저는 이 세 패턴의 길과 각각의 길이 유발하는 자립화 법칙을 언급하기 전에, 분기의 계기가 되는 데이터에 대해 말해두고자 합니다. 대개의 철학이 이미 부분적으로는 재귀적인 언설의 집합체를 다루면서도 인류학이 이미 체계화해놓은 '원주민 사상'과는 좀처럼 대면하지 않습니다. 토착의 철학이라 불릴만한 것이 존재한다고는 생각하지만, 그 수는 매우 적으며(민족지학의 연구보고에서 발견할 수 있는 것은 손에 꼽을 정도입니다), 모든 민족학자가 알고 있는 수준입니다. 따라서 어떤 경우에 우리들이 브리콜라쥬에 의지하여 수립하고자 하는 지식, 그 지식의 출발점이 되는 정보는 맥락 없는 단편적인 언표로서 우리와 우리의 대화상대와의 소통을 어떻게든 의미있게 유지하려는, 유의미한 시퀀스로 즉좌적으로 변환한 것에 불과합니다. 우리가 평소 집에서 이야기할 때와 똑같습니다. 좀더 정리된 언표라 해도 종종 알 수 없는 수수께끼가 섞이기 마련입니다. 예를 들어보겠습니다. 아마존에서 아추아르(Achuar) 족의 남성이 저에게 다음과 같은 꿈을 이야기 한 적이 있습니다. 그의 꿈 속에서 그는 나무 속에 있는 어느 남자로부터 '누이들을 소개시켜줄테니 내일 오라'는 말을 들었다고 합니다. 이 남자는 인간의 모습을 한 양털원숭이고, 내일 아내를 몇 명 주겠다고 한 것은 사냥하러 오면 사냥감을 주겠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당연하지만, 이와 같은 언표에 맞닥뜨리면 제일 먼저 생각하는 갈림길은 (이 길은 현지에 조금 익숙해질 때 비로소 가능해집니다) 조금 옛 표현을 빌어 말하면, 이해적(comprehensive)인 성격을 가집니다. 그런데 여기에서 강조하고 싶은 것이 또 있습니다. 견문의 흐름을 모으는 시퀀스와 행위 모델을 구축하려는 민족지학자의 시도는 사변적 의도를 가지고 행해지는 것이 아닙니다. 그 자신의 행동에 지침을 부여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해에는 우선 프래티컬한 역할이 있습니다. 왜냐하면 민족지학적 작업은 학자 스스로 수용한 사회화 프로세스, 즉 학습의 프로세스이며, 이와 같은 프로세스는 실천공동체에 몰입한 관찰자의 신체, 행동, 비판을 끊임없이 도야[陶治]하도록 촉구하기 때문입니다. 주인에게 이치에 맞는 행위모델를 부여함으로써 관찰자[손님]는 그들과의 관계를 지도하는 입문서를 작성하고, 자신은 목격자임과 동시에 당사자의 위치에 서서 어떤 행위와 자신이 만들어내는 해석 간의 일치(많든 적든 우연의 일치가 있습니다)를 아무때고 확인할 수 있도록 합니다. 

  그러나 이해란 자신을 위한 이해에 머물지 않습니다. 민족지학자는 타자, 즉 자신의 출신공동체에 이해방식을 제공해왔습니다. 이해가 퍼블릭해짐으로써, 이해의 해석이 별도의 프로세스를 밟음으로써, 결론적으로는 그 성격이 변하게 됩니다. 여기서 제2의 분기점이 발생하는데, 앞서 말했던 대칭화의 패턴에 따른 형태로 길이 갈립니다. 개념의 심화--로컬의 서사에서 보이는 개념이나 문화적 특성의 이론적 조작--와 주해의 체계화--현지 사상의 철학적 언어로의 번역--는 우선 하나의 길에서 작용합니다. 그것은 본질적으로 귀납적인 성격을 띱니다. 현상의 집합체는 민족지학자에 의해 어떤 완결된 세계의 내부로 해석되지만, 뒤이어 곧바로 같은 문화권의 인접한 사회에서도 찾아볼 수 있는 유사하며 보다 광범위한 현상의 집합체 내의 이형체로서 파악됩니다. 그러한 현상은 '로컬 색'이라고 말할 수밖에 없는 양상을 노정하면서도, 집합체의 독자성과 맨 처음의 생각을 점차 잃게 합니다.

  이 시점에서 별도의 분기가 가능합니다. 하나는 개념강화로 나아가는 길이며, 또 하나는 얼터너티브한 철학으로 향하는 길입니다. 어느 쪽도 실제로는 수단인 것이고, 귀납적 일반화와 언표의 파라미터(parameter 모집단)의 재편성을 이용합니다. 목적은 이제까지 분명하게 언어화되지 않는 관행을 개념으로 집약하고 그 개념을 표면화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해서, 한편으로는 제가 재정의한 애니미즘, 비베이로스 데 카스트로(Eduardo Viceiros de Castro)가 정의한 퍼스펙티비즘, 뒤몽의 계급적 포섭 등이 출현합니다. 다른 한편으로는 템페르 신부의 반투족의 동태적 존재론(ontologie dynamique bantoue), 로이 와그너(Roy Wagner)의 주체의 홀로그래픽(holographic) 이론이 있습니다. 양자의 차이는 방법보다는 그 영역[射程]에 있습니다. 개념강화의 경우, 그 의도는 순수하게 인문학적(anthropologique)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특정한 고유 상황의 연구를 기초로 획득한 새로운 분석도구를 제시함으로써 인간공동체 전반의 특징에 대한 이해에 공헌하는 것을 목적으로 하기 때문입니다. 얼터너티브한 철학의 언설은 또 다릅니다. 이것은 존재와 세계를 사고하는 데에서 별개의 도(道)가 존재함을 보여줌으로써 전통적 형이상학을 뒤엎는 효과가 있습니다.

  그러나 귀납을 연역적 수단의 부하로 둔다는 의미에서, 편성의 차이적 특징을 조직하는 방향으로 나아가는 길은 이제까지와는 그 성격을 달리하는 것 같습니다. 레비스트로스가 잘 다듬은 인척의 기본적인 수지상(樹枝狀) 도식이나 제가 제안한 식별모드의 표에서 보이는 개념적 오브젝트는 귀납적 일반화의 직접적 귀결로 발생하는 것이 아니라 어디까지나 모델입니다. 즉, 이것은 때마다 영감을 받아 잡다하게 만들어놓은(브리콜라쥬에 의한) 머티리얼한 장치--그래프, 도식, 표 등--입니다. 모델은 규칙성을 인정받는 현상의 그룹의 구조를 공간상으로 표시함과 더불어 현상 간에 가로놓은 관계에 대한 가설을 세우고 형태적 특질을 고안할 수 있게 합니다. 여기에서는 수단이 목적과 합치한다는 것을 지적해두겠습니다. 여기에서의 의도는 로컬의 요소를 분석개념에 변용시키는 것이 아닙니다. 인류학이 비교법학에서 이어져온 오랜 질문에 대한 답을 찾아가는 것입니다. 실천·제도·이데올로기의 몇몇 타입의 구조적 친화성·부적합성의 문제. 답을 찾아가는 길은 하나밖에 없습니다. 그것은 브리콜라쥬에 의지하면서 모델을 만드는 것입니다. 실천의 관리체계를 뒷받침하며 공동체에 특유의 스타일을 주입하는 것처럼 생각되는 존재론적 제 전제를 찾아내어 전개시키는 모델을.

  얼핏 보면, 민족지학적 경험에서 분기되는 것이 아니라 사고영역의 완전한 변환이 이뤄지는 것이라고 생각될 수도 있지만, 결코 그렇지 않습니다. 연구대상에 있어서도 방법에 있어서도 확실히 구분되는 민족학과 인류학의 전통적인 대립을 조망할 경우에 더욱 분명히 알 수 있는데, 지금 다루는 연역적인 사고는 실은 사고를 가능하게 하는 몇 가지의 선행 절차의 영향으로부터 완전히 벗어날 수 없습니다. (오늘 발표에서는 언급할 수 없지만 이러한 절차는 결국 드러나지 않고 끝나버렸습니다.) 실제로 『자연과 문화를 넘어서』의 전환모델은 (저와 다른 세력의 연구자의) 민족지학을 출발점으로 삼는 몇몇 귀납적 일반화를 통해 조금씩 형태를 만들어왔던 것입니다. 저로서는 물론 극히 평범한 것에 지나지 않지만, 그렇다 해도, 인류학자들은 끊임없이 풍부히 보완해야 하는 민족지학적 모노그래피 속에서 학문의 길을 선택하는 방법적 요소를 바로 짜올리고 있습니다. 그리고 추출의 노우하우는 또 다른 노우하우, 즉 공유된 필드워크의 노우하우를 근거로 하는 만큼 상당히 언어화하기 어렵습니다. 다른 인류학자가 민족지학적 데이터를 채취하여 취사선택하고 보고하는, 객체화과정의 제 절차는 좀처럼 명시되기는 어렵지만 노우하우를 공유함으로써 우리에게 [낯선 타문명을] 즉시 친숙하고 자명한 것으로 느껴지게 합니다. 추상화와 묘사, 귀납과 연역, 직접적인 지와 매개되는 지, 로컬의 개념과 일반화를 겨냥한 개념, 이들 사이를 부단하게 오고가는 인류학은 발견의 기술(art)로서 특별한 과학이라고 말할 수 있지 않을까요? 게다가 거기서 표류하는 모험의 향기는 우리들이 조우하는 사람들에게만 나는 것이 결코 아닙니다.      

   

  1. 멕시코 남부와 중미 일부 지방의 원주민의 언어 [본문으로]
Posted by Sarantoy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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